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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늦은 부고 <황도제 선생님을 기리며>

  나에게 있어서 중학교는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었던 곳이라 온 인생 중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중학교는 각 과목의 전문지식을 가진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좋았다.  특히 처음 입는 교복은 어른이 된 것 같은 우쭐함이  있었고, 신여성 교육기관으로  여자 국회의원이었던 리숙종박사가 하얀 돌계단 앞에서 푸른 통치마와 한복을 입은 모습은 내게는 큰 감동이었다.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 나는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그 분위기를 즐겼다. 특히  "이제 너희들은 진짜 여자이고, 성숙한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던  가정과 윤리 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다.  1970년대는 희망의 시대였다. 그 시절 생리대가 처음 나왔고, 아카시아 롯데껌, 삼양라면 등의 새로운 것들이 많아졌다. 날마다 새로운 변화와 온 나라는 새마을 운동으로 이른 아침 골목골목에 울리던 새마을 노랫소리가 지금도 귀에 머문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단정한 모습과  새로운 교수법으로 교과서외에 직접 조사한 내용을 가지고 토론식 교육을 하면서 학생을 독려했던 김선영 역사 선생님이 내게 소중한 선생님이었다. 항상 칭찬해 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기를 독려해 주었던 교수법 때문에 나는 그 당시 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우리 학교는 사법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사들이 많았는데 새 부임한 선생님들 가운데 연애 이야기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이 뭉글뭉글 꽃을 피웠다. 당시 교정은 산 언덕에 있는 위치 했는데 봄이면 별무리가 쏟아내리는 개나리 언덕을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리숙종여사가 책을 보고 앉아 있는 동상이 맞이한다. 아이들 사이에 수군수군 우리 담임 선생님과 남자 국어선생님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났다. 새로 부임한 남자 선생님은 그다지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선생님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평에 의하면 수업이 무척이나 재미있고,  다른 처녀 선생님들에게도 인기가 있다고 했다. 거기다 그가 황금찬 시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 선생님에게서 직접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을 위해 친언니의 형부처럼 두 사람의 사랑을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그 국어 선생님을 흠모 하였다. 그 감정이 오래 내 곁에 머물고 있었는지 우연히 중학 동창을 만났을 때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문득 "얘, 그때 우리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황도제 선생님 안부 너 아니?'라고 물었다. 그런데 친구도 다른 선생님 소식만 말하고 자신도 그 선생님의 소식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국어 신생님을 잊고 살았는데  신문을 통해 황금찬 시인의 별세 소식을 접했는데 기사 내용 중에 고인의 자녀 명단에 도제 샘의 이름이 없어서 어린 시절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어를 `황금찬시인의 아들 황도제'라고 넣었더니 황금찬 시인과 나란히 서 있는 중년의 황도제 샘이 서 있었다. 그는 2009년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교사로 무리하게 일을 하여 건강을 잃고 먼저 길을 떠났다는 슬픈 부고였다. 그의 지하 셋방 시를 읽어 본다. <지하 셋방> 빛은/가난을 피해/숨은 나를찾아 올 것이다./희망의 전달이라 하지만/도망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혈안이 된 빛의 두려움/나는 /숨이 멎는 지하 셋방의/숨 쉬는 수정체/ 침침한 방/죽음의 경험이 아닌/희미한 육신에 불을 켜는/비루한 목숨/차마 버릴 수 없어/벽에 손톱으로 판/달과 별을 본다./죽음의 신호처럼/반짝반짝 세상 속으로 몸을 추스르면/어둠은따스하고 관대하다./ 그러나/시작된 목 쉰 아우성/밤의 덫에 걸린 불빛들/생사의 눈물/애처롭다./모두/내 모습이다. 아마도 그 중학시절 선생님에게 직접 수업을 받았던 제자들이 선생님의 <지하 셋방> 시를 읽는 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시인은 진실을 노래하는 새인지도 모른다. 

 

 당신 우리 담임 샘은 얼굴에 여드림이 있었지만 자색 재킷을 잘 소화하는 멋쟁이였고 살짝 웃으시면 입에 보조개가 참 예뻤다. 당신 내 기준에 도제 샘은 좀 느끼한 젊은 선생이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그 시절로 돌아가 보면 갓 대학을 졸업한 선생님들은 고정관념에 엄격한 여자중학교에서 새롭게 교수법을 펼치면서 자신들이 양성하는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친동생을 가르치듯 열정을 토해 냈다. 그리고 서로의 교수법을 보고 매력을 느끼면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여학생들의 입방아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교 안은 매일 즐겁고 산의 새들의 지저귐처럼 늘 활기찼다. 봄 소풍과 가을 운동회 때의 아이들과 어우러져서 뛰고 달리던 젊은 교사들은 오십 대 교사들과는 다르게 항상 우리들 편이 되어 주었다. 그런 선생님의 용감한 지도로 우리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긍심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경우는 전통적인 사고를 가진 엄마로부터 도망쳐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학교 근처 떡볶이집에서 크로렐라 라면을 먹고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를 보고 무언가 소리를 하려는 엄마에게  "공부하다가 왔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면 엄마도 차마 내게 잔소리를 하지 못했다. 내게는 공부가 무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도서관에서 국어 선생님이 소개하는 세계문학 전집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에 폭 빠져 있었다.

 

  나는 중학시절 시인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사람이 황도제 샘이었다. 그가 황금찬 시인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시인이란 단어를 그냥 글자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직업이 기업인이었기에 나는 세상이 모두 이윤을 남기고 사람을 경영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이 직업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단순한 사춘기 때 내 가까이 시인의 아들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영광이었다. 황 선생님은 2009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나는 2005년에 암투병을 하고 있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대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시절 인연인 것이다.  선생님이 오래 살아서 다시 인연이 있어 한번 만나 그 시절의 우리 소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던 선생님의 젊은 날을 회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선생님도 아버님을 닮아 시인이 되셨기에 사람은 가고 그의 시만이 나이 든 제자에게 말을 한다.

그의 시 <감정 미술관>. "감정 미술관에는/내가 그린 그림이 한 점도 없다./빈 벽이다./  그것이 당신의 벽이라는 사실/사랑의 그림이 결혼 후에 한번 걸렸던가?/사랑 대신 적당히 당신을 속이기 위해/걸어놓은 달/아직까지 벽에 떠 있다니./  그 달빛으로 번역한 눈물의 삶/더불어 길을 잃지 않았노라고/각인된 혀끝에 묻어나는 혼야의 수결/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졌을까?/  내 젊음의 거품은 다 꺼졌는데/놀랍게도 지금까지/젊은 시절의 내 얼굴과 이름/암송하고 있다니/숭고함의 떨림이다./  늦었지만 더듬더듬/당신에게 다가가야 하는데/달빛에 쇠한/늙고 초라한 인상/  당신이 허락한다면/당신의 벽에 걸어도/되겠소?"라고 노래한다. 늦은 부고를 접하면서 시절 인연으로 도제 샘의 젊은 날과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쓴 시에서 "당신의 벽에 걸어도 되겠소?"묻는데 나 또한 황 선생님에게  어린 단발머리 소녀가 "당신을 소녀의 벽에 걸어도 될는지?" 여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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