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 최승자의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 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 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중도일보 우난순 기자 rain4181@의 글평
자학을 넘어선 위악으로 풍부한 시. 역시 최승자다운 시다. 기독교의 원죄의식의 상징인 뱀은 사악함의 메타포다. 시인은 자신을 늪 속에서 어둠의 자손으로 규정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토록 처절한 자기학대와 자기기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장 주네는 사생아로 태어나 좀도둑, 탈영, 남색 등 악취가 풍기는 온갖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악마에 혼을 판 주네의 작품은 그래서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예술가의 형벌에 축복 있으라.
'책사랑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함석헌/ 그대는 골방에 가졌는가? (0) | 2026.02.15 |
|---|---|
| 전자책 04출판/아무도 몰랐던 나의 이야기 (1) | 2026.02.12 |
| 김개미 시인/늘 그러면 누가 고양이랑 살아 (0) | 2026.01.16 |
| 글쓰기/사비로 <계속 쓰기> (0) | 2026.01.13 |
| 율곡 이이/자경문(自警文) (0) |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