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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탕밥memo

과속 사회의 그늘 /김병종

"잠 안 재우는 깻잎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속성 출하를 위해 조명등을 깻잎이 건강에 좋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탄소동화작용이 부족한 신경과민 깻잎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는 또 어떤가요. 역시 조명등 아래 태어나서 햇빛도 거의 보지 못하고 운동도 못한 채 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해 안된 지방인 마블링이 여러 군데 생기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맛있다고 먹는 것이지요. 성장 중심, 속도 중심 사회의 이면에 드리워진 풍경입니다."

미래상상연구소 홍사종 대표의 강의는 재미있다.
기상천외하고 기발해 보이는 예화들을 동원하고 관련 자료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로 듣다가 경각심을 갖게 되기도 하고 놀라게 되기도 한다. 그가 일상이다시피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면들, 특히 굴절되고 어두운 이면들을 가차없이 들추어 낼 때마다 그 현장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기가요 중에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이 그렇다 해서 무슨 군가는 아닙니다. 상심한 마음의 한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죠. 그런 끔찍한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원될 만큼 우리는 초자극 문화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4만달러 국민성공시대를 달리는 한국인은 그래서 피곤하고 비참합니다."

비단 그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과속사회와 자극문화는 오늘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다. 하지만 속도 속에 있으면 속도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 속도 바깥으로 나왔을 때라야만 제대로 그 속도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지난 여름 영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비로소 광속으로 흘러가는 한국사회가 눈에 들어왔다. 숲이 우거진 도시들과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떠나 보내버린 가치들이 그곳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비로소 과부하가 걸린 사회, 성장과 속도에 중독된 사회로서의 한국이 보이게 된 것이다.

자원도 부족한 나라에서 바삐 뛰지 않으면 선진국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문제는 과도한 속도와 과도한 경쟁이다. 이 속도와 경쟁에서 승자는 살아남겠지만 패자는 상실감과 박탈감 그리고 좌절의 상처를 남몰래 부둥켜 안고 가야 한다.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의 자살률이 최고라는 지적 따위는 새로울 것도 없는 정보다. 문제는 이 속도예찬의 사회, 범람하는 자극문화의 사회를 제어하는 그 어떤 장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 과거에는 추기경이나 종정 같은 종교지도자가 국민적 스승의 역할을 감당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보통신(IT) 강국답게 스승의 자리와 부모의 자리, 친구의 자리까지 인터넷이 다 차지하고 있다.

너나없이 인터넷에 묻고 인터넷이 대답한다. 그 존재감은 이제 우리 삶의 모든 인격체의 대리자가 될 만큼 압도적이다. 채찍을 휘두르지도 않는데 하루 몇 시간씩 그 앞에 복종한다. 친한 사이라도 2년에 세 번 이상은 못만난다며 `바쁘다 바뻐`를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들이 컴퓨터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막대한 시간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기계는 속도와 성장의 스트레스에 지친 우리에게 답을 주지도 위로를 주지도 못한다. 위로는커녕 "이 바보야. 아직 거기 밖에 못 왔어? 스티브 잡스를 봐, 저만큼 달려가고 있잖아"라고 질책하고 야유하는 것이다.

"20대 후반에 주식과 벤처사업으로 100억원대 재산을 모은 아무개 얘기도 모르니? 넌 언제까지 그렇게 찌질하게 살래?" 에이리언의 눈처럼 불을 켜고 비난과 저주를 쏟아놓을 뿐이다. 이 가혹한 교사 앞에서 속도열차를 타고 있는 한국인,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병들고 있다는 것을 뉘라서 부정할 수 있을까.

[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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