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남편이 실직하고 집에서 놀게 되자 상황은 급반전했다. 열심히 일을 해도 보람이 없었다. 남편은 자신의 처지를 미안해하기는커녕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 자신의 힘으로 일궈놓은 집에서도 쫓겨난 F는 다시 거리의 여인으로 돌아갔다. 며칠을 그렇게 보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은 만취된 채 F를 때렸다.
자신을 때린 뒤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을 보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편의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되자 그녀는 남편을 살해해 토막냈다. 아버지의 부존재(不存在)가 삶의 부조리(不條理)로 귀결된 사건이었다.
폭력 아버지는 대부분 가난한 가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접한 아버지 살인사건을 보고 그렇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대학교수의 아들 G군은 “집에 가기 싫었다”고 말했다.
G의 꿈은 커피 전문점 주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들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엇나가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비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며 다그쳤다. 물리적인 폭력만큼이나 무서운 것인 정신적인 폭력이다. 모욕적인 언어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아들의 가슴에 박혔다. 이랬으니 집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보다 더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고, 때론 분발하라고 닦달하기도 한다. 그런 ‘도움’이 자식의 미래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까. 자식이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 자식은 엇나가기 시작한다. 겉으로 듣는 척해도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G는 자신의 꿈과 너무 먼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가 싫었고, 결국 아버지를 없애면서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는 순간 그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못된 것만 닮는 사회
수많은 범죄자를 만나면서 나는 종종 하버드대 로버트 푸트넘 교수를 떠올렸다. 그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범죄율을 비교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지역 유대관계가 강화된 미국 중부지역과 그렇지 못한 남부지역을 비교한 결과, 남부지역의 범죄율이 높았다. 자신에게 부과된 문제를 주위 사람과 함께 풀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혼자 풀어가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은 반(反)사회적인 성격을 갖기 쉽다.
요즘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갖가지 범죄가 창궐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미국 남부사회를 닮아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엽기적 범죄영화 ‘양들의 침묵’은 더 이상 미국 영화 속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정신이 병든 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들은 비수를 들고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미국의 못된 면을 닮아가는 데도 시스템은 미국을 따라가지 못한다. 적어도 미국사회는 범죄자를 범죄의 경중(輕重)을 따져 분리 수용하면서 적절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교화한다. 예컨대 교도소 내 ‘용서의 프로그램’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위한 것이다. 어릴 때 부모에게 학대를 받은 피의자는 당시 상황을 재연해 스스로 당시의 부모를 용서한다. 그 결과 마음속 갈등은 해소되고, 반사회적 성향은 옅어진다. 이런 점에서 최근 법무부가 심리치료사를 교도소에 배치해 피의자를 상담하려 한다는 소식은 반갑다.
나는 범죄자를 만날 때마다 이들의 손을 유심히 살펴본다. 우리들 손과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손가락 마디가 온전히 자라지 못해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성인이 아니다. 성장 단계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에 따라 마디가 정상적으로 자라야 한다. 그래야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인다.
마디가 분절된 사람들, 그래서 기형적으로 자란 사람들의 손을 만져보면서 우리 사회의 기형을 절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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