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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나눔

★ 운명/임레 케르테스/다른우리

★ 운명/임레 케르테스/다른우리

『운명』의 독특한 관점은 이전에 나온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른 모든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이 작품은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된 끔찍한 일들을 분노의 감정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서서히 이끌어가는 방법을 통해 충격을 던진다.

이 책의 줄거리는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전. 헝가리는 1944년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이로써 헝가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의 운명도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에서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살던 15세 소년 쾨베시 죄르지도 유대인 공동체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아버지가 근로봉사에 징집 명령을 받고 죄르지도 소년 근로봉사에 동원된다. 그는 학교를 떠나 이제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몇 개월 후 죄르지는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버스에 실려 도시의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한 벽돌공장으로 보내진다. 그는 전쟁에 필요한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는 확신 속에 기꺼이 근로봉사 소집에 응하고, 잠시 후 수많은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탄다. 이로써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

강제수용소에 도착한 죄르지는 그곳에서 받은 인상을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거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집단학살 체제의 만행을 중심에 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과 일상을 새롭게 극복해나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접지 않는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부헨발트가 해방되면서 죄르지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부다페스트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도 계모도 만나지 못하고, 예전에 이웃에 살았던 사람들만 만난다. 죄르지는 그들에게서 부다페스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듣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모든 게 마치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죄르지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냥 ‘온’ 것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그 사건들이 ‘오는’ 데 기여했음을 직감한다. 그와 함께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상과 찰나의 행복을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끔찍했던 과거를 잊어야만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삶은 잊을 수도, 단절할 수도 없는 법이다. 시대의 학살을 방관자로 경험한 이웃뿐 아니라 죄르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만행을 함께 고발하고자 제안한 신문기자에게도 죄르지는 낯선 이질감만 느낄 뿐이다. 이러한 참담한 심정으로 죄르지는 이웃집을 나와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는 삶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발걸음을 뗀다. 아우슈비츠의 화장막 굴뚝 사이로 언뜻언뜻 피어올랐던 행복에 대한 아득한 기억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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