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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진

문경/희양산 봉암사2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曦陽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지선이 창건한 사찰.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지선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선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삼층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정진대사탑과 봉암사 정진대사탑비가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명산고찰을 따라』(이고운·박설산, 우진관광문화사, 1982)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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