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비가 서울에 오지 않아서 참 건조하고 청명하였다. 올해 농사를 짓은 지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고추는 병충해로 풍작이 좋지 않고, 비가 적어서 무 농사는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다가와서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기 전 전주에 주말 낙엽이 떨어지는 만추의 모습이 좋았는데, 이제 진짜 가을이 지나가려다 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가끔 휴가를 내어 숨구멍을 쉬어 주는데 올해는 여름부터 현재까지 휴가다운 휴가를 내어 보지 못했다. 공동모금회 2건의 사업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힘이 되는 한 열심히 하려 노력하지만 이런 수고에 대한 팽팽한 긴장과 직원들의 태도를 지켜보자니 가끔은 교만한 직원이 밉상스럽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하든 "내가"라는 말이 앞서면 "함께"라는 말이 멀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안타까울 때가 있다.
사실 모든이를 위한 일에는 내가 그리고 특정인의 이름이 나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는 문제가 내포된다. 조용히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꼭 그 누군가는 기억을 하고 그를 지켜보고 그에게 기회를 준다고 나는 믿는 사람이다. 누구나 기회가 와서 노력이든 타의 든 간에 기회를 얻었으면 감사하고 그 일을 수행자처럼 걸어갔으면 한다. 복지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개벽 천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그리고 미미하게 그렇지만 놀랍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변화되기도 한다.
가을비가 내리는 아침, 나는 모처럼만에 이 빗소리를 즐기고 있다. 비가 내림으로 마음의 평정도 찾고, 한해의 농사를 농부가 추수를 할 준비를 하듯 나도 올 한 해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여 본다. 곧 결산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걸어온 한 해를 곱씹으며 가을비에 떨어져 내린 낙엽을 바라다본다. 마치 내 모습 같은 측은 함이 든다. 누구는 융단 같다고 비유를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현재 행복감에 젖어 있거나, 인생의 비단길을 걸어왔거나, 아직 늙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시각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몸을 떨구고 봄을 기다리기 위해 긴 동면을 위한 준비를 하는 나무에게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요 없는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양념이 적은 듯한 담백한 김치처럼 내 인생의 맛이 담백하고 시원했으면 한다.
가을비가 내리니, 참 좋다. 아마도 이런 비를 보려고 올 한해 농사를 지었는가 보다. 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고, 참 가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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