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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탕밥memo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

[j Story] ‘무당 설움, 무당으로 성공해 풀다’ … 인간문화재 무속인 김금화씨

[중앙일보] 입력 2011.06.25 01:30 / 수정 2011.06.25 06:07

“외국인들 대단하죠 … 내가 춤추면 머리 흔들고 막 춤춰요”

한국의 굿을 세계에 알린 ‘대한민국 대표 무당’ 김금화(80)씨. 무형문화재인 ‘서해안 풍어제’(서해안 배연신굿, 대동굿) 보유자이기도 하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으로미국에서 굿을 했다. 한국 무당의 첫 해외 공연이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김금화씨가 인천 친수공원에서 풍어제 중 ‘대감놀이’ 를 하고 있다. 해학과 익살이 가득한 놀이라 웃음을 머금고 있다. [사진작가 이진환 제공]

대한민국 대표 무당

김금화씨는 서울 이문동 자택에서 그녀는 훤칠하고(키 1m67㎝), 자세가 매우 꼿꼿했다.

●외할머니께 굿을 배웠겠군요.

 “할머니 하는 걸 옆에서 조금씩 보고 따라 배웠죠. 그리고 열아홉 살부턴 저 혼자 대동굿을 했어요. 그게 5박6일 동안 하는 큰 굿이에요. 그때는 젊은 남정네들이 ‘새 만신 손 좀 한번 만져보자’고 장난도 치고 그랬죠. 그럼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놈들. 괘씸하다. 저리 비켜 서라’ 했어요.”(웃음)

●당시엔 만신이 흔했나요.

 “몇 없었어요. 그때는 만신 보려면 사람들이 60리 길(약 24㎞) 걸어오곤 했죠. 일본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탄압해서 많이 없어졌으니까요.”

20대 때 찍은 기념사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다.
●67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는 어떻게 나가셨어요.

 “이혼하고선 빈손이 돼서 서울로 사글세를 얻어 나왔어요. ‘내가 무당이면 도둑질을
하냐, 사기를 치냐. 우리 할머니·할아버지가 하시던 순수한 우리 것인데, 내가 왜 이렇게
버림받고 짓밟혀야 되나’ 싶었어요. ‘그래, 내가 무당으로서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오기
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고향 선배이고, 봉산탈춤 하던 양소운 언니가 ‘이런 대회
하는데 같이 나가보자. 야, 바닷가에서 하던 소리 같은 거 뭐 없네?’ 하더라고요. 그래
서 대회에 나가 굿이랑 소리랑 섞어 공연을 했죠. 거기서 개인상을 받고서 제가 하는 서
해안 배연신굿이랑 대동굿이 알려진 거예요.”

●인생 2막이 열린 거네요.

 “네. 차츰 자신감을 얻었죠. ‘무당도 무대에 올라 춤추고 소리할 수 있구나. 무당도 TV 방송에 나갈 수 있구나’ 싶었죠. ‘내가 무당으로서 긍지를 갖고, 옛날 어른들이 하던 것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인정을 받아야겠다’ 하는 사명감이 생겼어요. 인터뷰할 때마다 울었죠. 참 감사하기도 하고 서럽던 기억도 떠오르고···.”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공연도 곡절이 있었다면서요.

 “에밀레박물관장 하신 조자용 선생이 ‘해보자’ 하셨어요. 그래서 미국에 갔는데, 우리 영사관 사람들이 우리 옷차림을 보곤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느냐. 무슨 굿이냐. 당장 데리고 나가라’ 하며 무대엘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다른 공연 다 끝나고 카펫을 걷고 관객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는데, 조자용 선생이 우리를 떠밀어서 무대엘 올라갔어요. 죽기살기로 한두 거리 굿을 하고, 작두를 탔어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 무속문화를 제대로 선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해야 한다’는 일편단심뿐이었어요. 그랬더니 박수가 막 터지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공연 끝나고 조자용 선생이 ‘공연 끝났으니 이 사람들 데리고 한국 돌아가겠다’ 하니까 영사관 사람들이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하면서 붙들고 늘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2회 공연까지 해서 미국에서 26일 동안 공연했어요. 그렇게 해서 유명해졌죠.”

●다른 사람들 맺힌 한을 굿해서 풀어주고 계신데, 선생님 마음에 맺힌 것은 누가 풀어줍니까.

 “제가 스스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풀어야죠 뭐. 그리고 우리 제자들이 또 잘 풀어줘요. 자기들이 저랑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 그 아이들이 갈 길은 그래도 저보다는 수월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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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미래를 가장 궁금해 할 만한 이들이 정치인이다. 사람들은 ‘정치인과 무속인 간의 교류’에 대해 궁금해 한다. j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 중에 선생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많죠.

“말이 돌까봐 그런지 많이 오진 않아요.”

●역대 대통령 중에서 선거 앞두고 찾아온 분은 없었나요.

 “사람을 시켜서 제게 물어본 분이 두 분 정도 있었죠.”

 김금화씨는 정치인들에 대해 말을 아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만 빼놓고.

 “1993년인가, 제가 호암아트홀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거기엘 오셨더라고요.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죠. 그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는 분이었어요. 복떡을 드리면서 ‘힘 내고 용기를 가지시라. 앞으로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죠.”

 이후 두 사람은 청와대에서 재회했다. “무형문화재들을 다 초청하셔서, 같이 가서 사진 찍고 그랬었어요.”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뜨자 김금화씨는 인천에서 진혼제를 지냈다.

 “그 진혼제는 제가 자비로 해줬어요. 민주당 사람들은 와서 절만 했지.”

 이듬해 6·2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했다. 절을 했던 사람들은 “그때 진혼제를 잘해준 덕”이라고 고마워했다.
 “그래서 내가 ‘굿 값 안 줘?’ 하고 물었 더니 그냥 웃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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