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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진

오사카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오사카 성 (大坂城,)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이것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이다. 1585년에 5 층 8단, 검은 옻칠을 한 판자와 금박 기와, 금 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형 천수각 을 완성했다. 이것으로 히데요시는 천하 권력자의 권위를 마음껏 과시했다. 그러나 1615년 에도막부가 도요토미를 쓰러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 '오사카 여름의 전투'에 서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린다. 그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 영역에 석벽을 다시 쌓아올려 성을 새롭게 구축한다. 이에 도요토미의 천수각보다 더 큰 규모로 1626년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각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천수각도 1665년에 소실된다. 이후 세번째 천수각은 1931년에 도요토미가 축성한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본떠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대 위에 세워졌다.

 

주소 : 1-1

가는 방법 : JR 오사카조코엔()역, JR 모리노미야()역에서 하차

 

대망 책을 통해 중학시절 일본의 3명의 장군중 한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과 그 아내를 위해 지었다는 오사카성, 일본 3대성 오사카성 천수각을 방문하려니 가슴이 설레인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남자라면 한번쯤 대망을 읽어야 하고,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했기에 대기업에 취업이 되면 일본으로 해외연수를 보냈다. 그 당시 내 친구들의 입을 통해 들은 일본의 문화과 까십거리를 구전으로 들었던 나로서는 내 눈으로 일본을 보는 즐거움이 더 배가 되는 느낌이다.

 

 

 

 

오사카성 주변에 NHK방송국과 박물관 건물이 있다. 멀리 오사카성이 있다는데 흔하게 보았던 오사카성 천수각이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내려 성으로 향했다. 

사전 지식이 없는 나에게 커다란 해자와  물을 배워야 했기에 대기업에 취업이 되면 일본으로 해외연수를 보냈다. 그 당시 내 친구들의 입을 통해 들은 일본의 문화과 까십거리를 구전으로 들었던 나로서는 내 눈으로 일본을 보는 즐거움이 더 배가 되는 느낌이다.

 

 

오사카 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갑자기 해자가 있고, 거기다 이중으로 해자가 설치된 것이 이성의 건축 특징으로, 우리나라가 당파 싸움에 있을 때 일본인은 서양의 성처럼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성을 쌓고 강성한 나라로  이렇게 준비하였기에 우리나라를 침략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사카 성은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달성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으로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1583년에 축성을 시작했다.

완성 당시 금박 장식으로 뒤덮인 호화로운 모습이었으나 이후 소실과 재건의 역사를 거쳤으며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것인데 병풍에 그려진 그림을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가 사망한 후인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1620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을 재건했으나 이전의 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벼락을 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1931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지만, 성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모습과 건립 당시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오사카성 안은 약 6만m2의 잔디 공원과  성과 성 주변의 공원은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봄엔 벚꽃이 가을에 단풍이 곱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오사카성의 해자와 현대 건물이 어우러져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지만 고대 국가들의 해자라는 건축방식과 오사카성의 특징은 성벽이 곡선으로 네모 반듯한 형태보단 곡선으로만들어 성을 기어 오르기 어렵게 한 것이란다.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인 건축양식을 한참을 바라 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오와리국[:]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 간파쿠[]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이 되자 후지와라[]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90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시대를 열었다. 1593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상인으로 유명했던 가문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수 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 현 가라쓰()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고전을 거듭하였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 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성안으로 들어 가기 전에 처음 해자를 지난 오른쪽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신사가 있는데 이곳도 잊지 말고 꼭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출세를 한다고 하니 꼭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오사카성 성문안으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성안에 들어서 서니 성벽의 돌의 크기를 느낄 수 있도록 성벽을 보여 주고 있다. 

 

 

 

 

 

오사카 성의 주탑은 지상 8층으로 덴슈카쿠()라고 하는 높이 55m의 누각이다. 덴슈카쿠의 1층에서 7층까지는 역사자료관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상을 비롯해 당시의 무기와 갑옷, 복원 모형, 민속자료 등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시어터 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사카 성을 소개하는 영상을 90인치 화면으로 제공한다. 최상층인 8층에는 오사카 공원과 주변의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