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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예술관광 [현재창]
경주 주요 관광지, 문화재자료, 문화예술행사 안내.
http://culture.gyeongju.go.kr (26k, 2006. 11. 18)

chouna의 경주 기행
성지 남산의 불적
Namsan, the Sacred Mountain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四面石 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비의 형상과 비문의 형태


비는 집안시(中國 吉林省 通化專區 集安市)의 시청소재지인 통구성(通構城)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太王村 大碑街)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에는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너비 1.35m∼2.0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로 개석(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비신의 사면에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5mm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비신의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건립과 발견 및 조사


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 능비의 존재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이지만, 비가 고구려의 유적지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봉유설 芝峰類說》에는 비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비가 재발견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하여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되어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그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 불량과 탁본 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 혹은 쌍구가묵본(雙鉤加默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 경 만주를 여행 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기초로 한 쌍구가묵본이 일본에 반입되어 비문의 초기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된 끝에 1889년에 그 내용이 세상에 공표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인 1885년경부터는 중국 학계에서도 비에 대한 조사와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 뒤 1899년경부터는 일본, 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를 위한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石恢付塗)을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 문자가 오독(誤讀)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쌍구본'이나 석회부도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18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 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었으나, 현재 원탁본이 발견되어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의 증거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의 구성과 내용 및 성격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 :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2부는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정복 기사는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알려주고 있다.

연구사


광개토대왕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1백여 년간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지금까지 약 200여 편의 연구 업적이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한국 고대사가 갖는 일반적인 한계와 고구려사 연구의 현실적 한계 및 3국 학계의 미묘한 관계에 따라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비판에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비연구는 일본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의 해명이라는 비 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


(출처 : http://www.jungto.org/gf/kor/min/minp3.htm)

자격루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물시계이다. 물시계는 떨어지는 물방울 양의 규칙성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하였는데,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은 물의 압력에 따라 오차가 생길 수 있다. 이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 물통의 수를 조절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물통의 수를 3∼5개 정도로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718년(성덕왕 17)에 처음으로 누각이라는 물시계가 만들어져, 누각전(漏刻典)이라는 물시계를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어 박사 6명, 사(史) 1명을 두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 시대 물시계의 구조는 물통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하고 그것을 받는 그릇에 시각을 새겨넣은 잣대(箭)를 띄워 그 잣대가 떠오르는 것을 통하여 시각을 아는 방식이었다.

세종 때에는 물시계 제작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정교한 자동 시보 장치가 붙은 물시계가 제작된 것이다. <세종실록>은 장영실 등이 2년여의 노력 끝에 1434년(세종 16) 물시계를 완성해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물시계가 바로 자격루(自擊漏)이다.

청동으로 만든 큰 물통(大播水壺)은 지름 93.5cm, 높이 70cm이고, 도기로 만든 작은 물통(小播水壺) 2개는 지름 46cm, 높이 40.5cm이며, 청동으로 만든 물받이통(受水筒) 2개는 바깥지름 37cm, 높이 199cm이다. 물이 흘러내리는 관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큰 물통에 뚫린 구멍의 지름이 2.7cm이므로 대략 그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종은 초경(初更)에 28회를 쳐서 통행금지시각을 알렸는데 이것을 인경(人定)이라 하여 성문을 닫았으며, 오경(五更)에 33회를 쳐서 통행해제시각을 알렸는데 이것을 바라(罷漏)라 하여 성문을 열었다.

(출처 : http://www.scienceall.com/sa0them/03/02e/read.jsp?selMenu=ab&cId=22698)

종목국보 31호
명칭경주첨성대
(慶州瞻星臺)
분류첨성대
수량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신라시대
소유자국유
관리자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ocp.go.kr:9000/n_dasencgi/full.cgi?v_kw_str=&v_db_query=A1%3a11%2cA3%3a31%3b31&v_db=1&v_doc_no=00000031&v_start_num=1&v_disp_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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