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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임방공지사항

세종대왕은 성군(중도실명자)

백성의 안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정치를 펼친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업적도 위대하지만 이면에 있는 모습에서 더욱 인간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CEO가 될 수 있었던 세종대왕의 모든 것을 집중분석했다.

<목차>
1. 불운했던 세종대왕
2. 준비된 CEO, 세종대왕
3. 세종대왕의 리더쉽(1)
4. 세종대왕과 이회창, 노무현 비교


세종대왕이 한 국가의 CEO로 등장한 것은 22세였다. 세종대왕은 아직 약관이랄 수 있는 22세에 부왕인 태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은 32년으로 5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하면 한글,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이 떠오를 것이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발명품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세종대왕의 불운했던 부분은 별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세종대왕이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큰 시련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종대왕을 괴롭힌 첫번째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국상(國喪)이다. 세종대왕의 32년의 재위기간 중 10년 동안 상복을 입고 지냈다. 즉 한 나라의 경영자가 10년 이상 상복을 입고 찢어지는 가슴을 다잡으며 나라를 운영했다는 의미다.

세종대왕은 재위기간 중 아버지와 어머니, 큰아버지, 아내와 생을 달리했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대왕과 어머니 원경왕후, 큰아버지 정종대왕과 사랑하는 아내 소헌왕후와 사별하면서 재위기간의 3분의 1을 상복을 입고 지냈던 것이다.

특히 세종대왕의 가장 큰 아픔은 딸이 죽었을 때였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누구보다도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던 정소공주를 잃었을 때의 고통과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열 두살 어린 정소공주가 세상을 뜨자 세종은 너무도 상심해서 친히 제문을 지어 어린 딸의 영혼을 달래기도 했다.

세종대왕을 괴롭힌 두 번째의 큰 불행은 병마와의 투쟁이다. 세종대왕은 각기(비타민B₁결핍에 의한 질환)와 창질(피부나 각종 장기 등에 생기는 고름), 조갈병(요즘의 당뇨병) 등과 싸우면서 나라를 경영했다. 머리가 조금 아파도 쉬고 싶은 게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인데도 세종대왕은 큰 병과 싸우면서 활동했다는 것은 인간승리다.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극심했던 각기(脚氣)는 세종대왕의 왕성한 활동력을 제한했다. 또 몸을 돌아눕기조차도 어렵게 하는 창질(瘡疾)은 끝없이 이어지는 오한에 시달리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조갈병(燥渴病)은 갖가지 합병증을 일으켜 훈민정음을 반포할 무렵에는 눈앞에 앉아있는 신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안질을 앓았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이런 왕의 모습을 보기가 정말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신하들이 임금의 의사 즉, 전의(典醫)들과 의논해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검은 염소’를 고아드시기를 간곡히 청했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먼저 ‘검은 염소’가 어느 나라의 짐승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외국에서 들어온 짐승이라고 대답하자, 세종대왕은 “어찌 임금의 병을 고치려고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짐승의 씨를 말릴 수가 있겠느냐”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세 번째로 세종대왕은 국민들의 부도덕한 행동 때문에 고민했다. 지금의 시대라면 CEO들은 덮어두고 싶었을 법한 사건을 세종대왕은 스스로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친히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진주에 살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던 세종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임금이 부덕한 때문이라며 깊이 상심했고 충효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당시 대제학이던 충신 변계량이 세종대왕에게 효제(孝悌)의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법으로 효행록(孝行錄)을 펴낼 것을 간청했다. 효행록으로 우매한 백성을 교육해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를 시행하려 했지만 당시에 사용하던 문자가 백성들이 깨우치기 어려운 한자였기 때문에 성과가 낮을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세종대왕은 배우기도 쉽고 쓰기에도 편리한 한글을 창제하려 했고 결국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값진 유산인 훈민정음이 탄생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통치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줄 아는 고난 극복의 지혜와 슬기가 배어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제 목 : 담론 122.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 역사의 고갱이를 알려 하거든 무엇보다도 한민족 고유의 신 교(神敎)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는 의문의 화두를 던졌다. 수없이 개찬 왜곡된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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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란 과연 무엇인가.

동학이 들고 일어났으나 유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한 신교의 사명은 무엇인가. 신교가 무엇이기에 신교를 모르면 한국의 진정한 역사대강을 모른다 단정했는가?

이는 초대 단군 성조가 축조한 강화도 마니산(마리산)과 같은 소도 보본 단을 중심 한 민족고유의 핵심적인 영적 세계를 말함이다.

이 영적인 신교세계가 바로 김 부식, 일연 김 견명 등에 의한 역사왜곡과 각종 병란, 중화독, 일제 식민독, 서양독 등의 사대주의에 의해 분탕질이 된 것이다.

역사 혼을 잃으면 어느 지경까지 가느냐 하면, 유교국가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 유교라는 가치체계의 한계성이라 할까 하는 것에 의해 원죄론 적인 사대주의자가 되어 엉뚱한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 아닌 모순이 생긴다.

즉, 태조때 정도전을 비롯해 세종때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고려사를 저술할 때 고려가 폐하, 짐, 조(詔), 황후, 태자 등의 자주적이고 독자적 왕국에서 사용하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우리는 일개 제후국에 불과하다 하여 전하, 과인, 교(敎), 왕후, 세자로 고치게 했다.

물론 세종의 명으로 원래의 칭호로 일부 바로잡아졌다고 학자들은 말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완전히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이미 세종 자신부터가 북벌주의자 최영을 쳐죽이고 이신벌군(以臣伐君)으로 혁명한 친 명 사대주의자 할아버지 이 성계와 부친 이 방원의 사관적 한계와 왕위를 넘기면서 가문의 내력과 왕조에 대한 비밀 및 왕조의 태생적 한계를 부탁받은 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모든 지성인은 대국적으로 제후국의 나약한 선비로 민족자주성에 관한 한 이러한 본질적인 모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으로 만일 한반도의 역사를 비교적 근사치로 헤아려 보고자 한다면 기록상으로는 우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고려이전의 기록으로는 중국 사서를 이용하여 조작한 삼국사와 삼국유사가 있었지 만 이것마저도 조선의 세종이 조작하고 또한 원본을 없앴고, 고려실록도 없앴으며, 고려사를 완전 조작하여 만들어 고려와 삼국의 역사를 인멸하였다.

이러한 역사조작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가문의 흑막을 덮고 조선의 정통성확립을 위해 저질렀으며 이방원의 뜻을 계승한 세종 충녕이 저질렀다. 왕조의 비밀과 역사의 비밀. 어느 왕조 건 역사의 비밀은 있는 법이며 혈통의 비밀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김수로왕과 김유신이 한무제 때 표기장군 휴도왕 김일제의 후손임은 공개된 비밀이며 일본 천황가가 백제계와 신라계 및 가야계로 신무동정의 기사로부터 위조되었음은 이미 만천하가 다 아는 공개된 비밀이 아니던가.

사마천의 사기가 그 뿌리인 동이족의 역사를 잘라 비틀은 위조사서이며 공자의 사서삼경이 위조인 것은 이미 만인이 다 아는 공개된 비밀이다. 만일 주원장이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 출신이라면 어떨까.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혈통숨기기의 왜곡과 인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과연 큰 비밀이 될까? 만일 우리에게 그렇게 믿고 따랐던 아버지가 중국인이라거나 일본인임을 알았을 때 받는 충격은 얼마나 클까?

역으로 일본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국민적 구심점 일본 천왕이 한반도계의 혈통임을 알면 일본국민의 마음은 과연 어디에 부쳐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로 일본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왜곡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가시마 노보루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태조 이성계로부터 태종 이 방원 세종 충녕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가장 인멸한 장본인이라면 그리하여 이들 시대에 집필된 고려사가 왜곡사서이고 왕건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그 충격은 얼마나 클까.

성군으로만 알고 있는 세종의 양면성은 무엇인가.

역사왜곡과 인멸 그리고 태종과 함께 역사소각의 대표적 주범으로의 세종과 측우기를 비롯해 각종 과학기기 발명과 훈민정음반포의 성군 이미지와 환단고기가 증거하고 있듯이 3대 가륵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문을 훈민정음으로 뒤바꿔치기하고

단지 제자론, 음운론, 음성론 등을 연구해 그 해제(解題)에 해당하는 해례본을 써서 첨가했을 뿐인 것을 창제로 뒤바꿔치기하고 아버지 태종의 염원대로 가문의 혈통과 고려로부터의 왕조의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려 했던 역사 왜곡자로의 충녕을 우리는 어떠한 관점으로 여과해 받아들여야 할까.

수없이 왜곡, 개찬한 고려사의 흔적을 보자.

*태조 4년: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국역 조선왕조실록 이하 동일)

*태종4년: 하윤(河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고려 관제(官制)를 《고려사(高麗史)》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태종 14년: 영춘추관사 하윤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게 하다. 하윤·남재·이숙번·변계량에게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태종 16년 하윤(륜)이 죽어 뜻을 못 이룸.

*《고려사(高麗史)》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鄭道傳)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정도전이 임의로 왜곡한 것을 세종이 미워하니 변계량과 정초가 “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을 증손(增損)한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세종 1년: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해야 함을 말하다. 유관·변계량 등에게 《고려사》의 개수를 명하다

*세종 3년: 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의 유가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유관(柳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헌상해 올렸다.

*세종5년: 지관사 유관·동지관사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케 하다

*세종6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이성계 태종의 사대사상을 이어받은 세종의 사대주의 사상이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와 같다.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나라와 우나라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 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 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리기를,

‘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풧)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임금 생일)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 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세종 7년: 윤회가 지은 서문은 쓰지 않고 우선 계량의 말에 좇도록 하겠다.

*세종12년:“최 도통사(崔都統使)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이 죽은 뒤에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순(循)이 대답하기를, “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 ‘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

*세종 14년:《고려사(高麗史)》를 보고 춘추관(春秋館)에 전지하기를, "편년의 필법으로 이를 수찬(修撰)하여, 차라리 번거로운 데에 실수가 있더라도 소략하여 사실을 빠뜨리지 말게 하라.”

*세종20년: 경연에 나아가 《고려사》의 체재에 대해 논의하다. 춘추관에서 신우·폐왕 우·폐왕 창으로 할 것을 아뢰다

*세종31년: 기·전·표·지로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다.

*문종 1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그 범례(凡例)는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법받았으며,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모조리 성재(聖裁)에 품신(稟申)하였습니다. 본기(本紀)를 피하고 세가(世家)로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함을 보인 것이요, 위조(僞朝)의 신씨(辛氏)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것은 참절(僭竊)에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라 했으니 사기를 본받은 것이나 우리 역사를 본기라 말 못하고 세가라 한 것 등 위서 논쟁은 그만두고도 고려사는 서문부터 사대주의 사상이 흠뻑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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