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개관 반세기를 넘어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모신 박수근 예술세계. 무엇보다 진실성이다. 박수근은 선하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화면에 담고자 노력한 화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가식이 없다. 눈에 보이는 현실 풍경 그대로 집약해 묘사했다. 그가 즐겨 다룬 소재는 사람이다. 그것도 도시 변두리이거나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픈 시대의 자화상: 남편을 잃었지만 강인한 아낙들 한국전 지후 폐허 속에서도 작가는 희망의 새싹을 보앗다.
기름기 낀 무채색 가까운 빛깔 열십자 모양으로 수 백번 붓칠한 고향의 아련한 질감으로 표현, 흑백사진처럼 추억을 소환
11960년대 전반 `고목과 여인`
그의 단골 인물은 아낙네라고 불러야 정감이 가는 촌부(村婦)들이다. 즉 생활을 담보하고 있는 변두리의 중년 여성들이다. 6·25전쟁 시기에 월남한 화가는 전후(戰後)의 피폐한 사회를 기록했다. 폐허의 도시는 삶을 고달프게 했고, 아낙네들은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다니면서 생활을 꾸려야 했다. 특이하게도 박수근 그림의 사람 가운데 젊은 남성들은 보기 어렵다. 노동력 있는 청장년층의 남자가 없는 마을, 그것은 전쟁 이후 가장 부재의 사회를 의미한다. 청장년의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쟁의 상처를 암유한 박수근표 도상이다.
폐허를 딛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박수근 그림에 화려한 원색은 없다. 무채색의 계절이다. 춥고 굶주리는 세월의 풍경이다. 흑백 회색조의 화면은 암울한 시대의 상징이다. 그의 캔버스는 기름기를 뺀 물감을 열십자(十)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바탕을 칠했다. 겉에 드러난 물감층은 우툴두툴 질감을 보였다. 회색조의 바탕 위에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대상을 단순하게 묘사했다. 배경은 생략하고 주제만 집약시키는 묘사 방법은 관객에게 흡인력으로 작용한다. 박수근 작품의 매력은 단순한 형식과 내용이지만 화면에 스며 있는 잔잔한 울림이다. 바로 인간애(人間愛)다.
화가의 경제적 궁핍은 대작 제작을 어렵게 했고, 그런 결과로 박수근 작품은 대개 소품이다. 하지만 소품일지라도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사실 박수근 작품은 소수의 대작보다 오히려 작은 규모의 작품에서 짜임새 있는 빛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량주의의 현대사회와 결이 다른 특징이다.
박수근은 경주를 자주 갔다. 게서 신라문화를 연구했다. 실제 신라 와당이나 마애불 같은 유물을 탁본하기도 했다. 마애불 같은 효과, 바로 박수근 캔버스의 외형적 특징과 맞물린다. 박수근은 그림을 그릴 때 화강암 조각을 매만지면서 그 표면 질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박수근 화풍은 본격적으로 추구한 연구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미술대학은커녕 제도교육의 혜택조차 받지 않고 독학으로 일군 화가의 독자적인 예술세계. 박수근은 생래적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했고, 특히 석조문화의 특성을 체득했다. 동북아시아 삼국의 전통은 각각 재료의 특징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의 흙, 일본의 나무, 그리고 한국은 돌로 특화시켰다. 즉 같은 탑이라 해도 중국은 흙을 활용한 전탑(塼塔)의 나라이고, 일본은 섬나라답게 목탑의 나라다. 반면 한국은 화강암에 의한 석탑의 나라다. 불교 교리에 의거해 탑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재료는 자연환경에 따라 각각 적응했기 때문이다. 돌 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나라의 전통을 박수근은 예술적 토대로 삼았다. 석조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란 한국인이라면 '박수근의 돌'과 쉽게 친해질 수밖에 없다.
박수근의 아호는 미석(美石)이다.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화가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는 조선시대에 백자 흙의 생산지로 유명했다. 물론 강원도는 산악지대여서 바위산이라는 자연환경의 특징을 간과할 수 없다. 박수근이 돌을 주목하게 된 배경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래서 박수근은 '아름다운 돌'을 좋아했고, 자신의 화풍을 일구는 토대로 화강암의 표면 질감을 창안했다.
화가는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과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원천을 느끼고 그것을 조형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박수근의 돌 예찬이다. 석조물에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원천을 느끼고 있다는 화가.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동시대 대부분의 화가들은 서구식 아카데미즘의 추종에 불과할 때, 독학으로 일군 박수근은 개성적 화풍을 일구었다. 악전고투의 과정을 통과한 '흙수저' 출신의 성공은 사회적 미담이기도 하다. 자수성가한 '흙수저' 출신. 그래서 오늘날 더 많은 감동을 안겨 준다.
어린 시절 박수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르비종 농촌 풍경을 즐겨 그린 농민화가 밀레, 그의 대표작 '만종'은 어려운 시절의 우리네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도상이었다. 목가적 풍경, 거기에 안식과 평화가 스며 있다. 박수근은 자신보다 꼭 100년 전에 태어난 밀레를 왜 좋아했을까. 인간의 진실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극빈가정 출신 박수근은 구혼의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세요." 겨우 붓과 팔레트밖에 없는 가난뱅이 화가,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하지만 이웃집 처녀 김복순은 남달랐다. 박수근의 아내가 되어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박수근 그림 속에 나오는 중년 부인의 모델은 화가의 부인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박수근 작품 속의 아낙네는 '아내의 초상화'라 해도 좋고, 그것은 한 걸음 더 나가 '아내 예찬'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부부애 혹은 가족애는 잔잔한 울림의 원천이다.
박수근 소재의 또 다른 하나는 나무다. 그것도 이파리 하나 허용하지 않는 나목이다. 박수근 나목의 특징은 푸른 잎이 없다는 것 이외 겨우겨우 생존하고 있는 듯 처절하고 앙상하다는 점이다. 생존 투쟁의 현장이다. 나무는 필요 이상으로 가지치기가 되어 있고, 게다가 심하게 굽어 있다. 수직으로 늘씬하게 쭉쭉 뻗은 나무가 아니다. 굴절되고 절단된 가지, 바로 갈등과 궁핍의 상징이다. 역시 전쟁 이후의 사회를 증거한다. 누구나 다 어려웠던 시절, 박수근은 올곧게 성장하지 못한 나무로 사회를 응축했다. 겨울 풍경이다. 춥고 굶주린 세월이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나무다. 봄은 꼭 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근 그림은 고향 생각을 나게 하고, 또 어머니의 모습과 연결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어린 시절의 흑백사진과 겹쳐지는 추억을 꺼낼 것이다. 박수근은 아낙네와 나목으로 시대정신을 표현했다.
단순한 소재와 단순한 표현 형식, 이에 대하여 박수근은 이런 말을 남겼다.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일상생활의 충실한 기록자로서의 고백이다. 가식 없는 사회, 그 진실함을 화면에 재현하고자 한 화가의 노력, 바로 박수근 예술의 본령이다. 사회가 단조롭고 평범하기 때문에 화가의 그림은 늘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박수근은 동일 소재를 반복해서 그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미술시장에서 최고의 경매 가격을 기록하게 했던 '빨래터'의 경우 같은 형식의 그림은 일곱 점이나 남아 있다. 이는 좋게 표현하면 동어반복의 심화 작업이라 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구매자의 요청에 의한 주문생산일 수 있다.
1956~1957년께 `노변의 행상`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은 가장으로서나 화가로서 성실했다. 미군 PX에서 미군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돈을 모아 창신동에 기와집을 샀다. 전업 화가의 전범을 보인 흔치 않은 사례다. 작업실이라 해봐야 좁은 대청마루가 전부였다. 열정을 담은 그의 작품은 주한 외국인들이 구입해 주었고, 이런 물적 토대는 가정생활을 이끌 수 있게 했다. 한 가지 더 추가할 특기 사항. 박수근 작품의 주요 고객은 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작품에 서명할 때 한글을 사용했다. 여타의 화가들이 영문으로 서명하는 것과 대조적인 부분이다. '수근'이라고 서명한 숱한 작품들.
박수근은 어렵게 마련한 창신동 집을 등기 문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변두리에 가까스로 집을 마련해 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내장 수술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결국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화가가 눈을 잃는다는 것, 불행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국전 전횡시대. 일본 유학을 갔다 온 같은 또래의 화가들은 박수근 출품작을 낙선시키기도 했다. 좌절의 세월은 술로 보내게 했다. 육신은 피폐해 갔다. 불과 51년 동안의 생존, 그것도 전쟁 시기에 월남했으니 그의 본격적 작가 생활이라고 해봐야 10여 년에 불과했다. 이렇듯 짧은 기간에 박수근은 유화 440점 이상을 남겼다. '국민화가'라고 불리면서, 미술시장에서 국내 최고 가격으로 거래되는 '비싼 화가'로 등극하기도 했다. 화가는 생전에 가난함을 안고 살아야 했고, 유족 역시 경제적 풍요로움과 거리가 멀었지만, 미술사에서 박수근 이름은 최고봉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판잣집` [사진 제공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왜 박수근 열풍이 일고 있는가. 세계 최고 수준 자살률과 최저 수준 출산율의 나라, 게다가 코로나19의 난국에서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받고 싶을 것이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박수근 작품은 따뜻한 위로를 안겨 준다. 고향 어머니의 모음(母音)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의 폐허를 딛고 일가를 이룬 흙수저 출신의 자수성가를 거울로 삼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우선주의의 시대에 민족적 양식으로 독자적 화풍을 일군 화가의 신념에 존경의 옷깃을 여미게 하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이 강조했듯이 '아름다움의 원천'을 담은 작품은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이 또한 행복의 출발점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봄을 기다리는 나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