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 유적'은 약 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인들의 주거 원형이 남아 있고 빗살무늬토기 등 당시 생활상이 잘 보존돼 우리나라 중부 지역 신석기 시대의 대표 유적으로 꼽힌다.
강동구는 암사동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세미나 개최, 학술연구조사, 외국인 전문가 초청·유적홍보 등을 추진 중에 있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암사동 유적에서 나온 첨저형 빗살무늬토기는 일본의 '죠몬토기', 중국의 '채색 토기'와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토기 문화로서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와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암사동 유적에 대한 학술연구가 더 필요하다"며 "다른 신석기 유적군(양양 오산리 유적, 부산 동삼동 패총)과 연계해 등재를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의 상류 쪽 천호대교. 이 다리를 건너면 서울 동남권의 부도심인 천호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길을 잡고 약 5분쯤 가면 암사역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한강을 끼고 있는 동네가 바로 암사동이다.
암사동은 ‘바위 암岩’에 ‘절 사寺’로, 바위에 절이 있는 동네란 뜻인데 언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는 신라 시대부터 아홉 개의 절이 있어 ‘구암사九岩寺’라 하였다. 그중 삼국 시대 초창기 백제 불교의 효시 격인 백중사(伯仲寺)가 위치했던 자리도 있는데, 이 절을 속칭 ‘바위절’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암사岩寺’라 한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 또한 조선시대 유명 학자인 서거정(徐居正)도 시를 통해 ‘산 모습이 물에 의해 끊어지고(山形臨水斷)...마음에 먼지가 저절로 사라진다(胸襟自不埃)’라고 읊고 있다.
또 암사동에는 볕우물, 불현마을, 점마을, 새장터 등 오래 된 마을이 있었다. 점마을은 이곳에 백제 시대부터 궁에 쓰일 그릇을 구웠던 가마가 있었는데 꽤 오랜 시간 광주분원과 함께 도자기 생산지로 그 이름이 짱짱했다. 볕우물은 볕 잘 드는 곳에 백제인들이 만든 우물이 있었다는 구전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한강 수로에서 장사하는 이가 많아 ‘암사동 구천면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꽤나 부유했던 동네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지금은 동쪽으로 고덕1동, 남쪽은 천호1동, 명일동, 서쪽으로 한강 건너 광진구, 북쪽은 구리시를 바라보고 있다.
암사동의 상징은 ‘선사 시대 유적지’다. 사적 제267호로 지정된 이곳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50여 기의 신석기 시대 집터와 3개의 문화층을 확인했다. 각 문화층에서는 토기, 백제 시대 옹관 2기, 건물터 등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약 6000년 전 한강 인근에 부락을 형성한 신석기인의 거주지로 한반도의 중서부 지방을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해, 갈돌,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 되어 신석기인들의 생활 문화를 추측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재 유적 내에 복원 움집 9기와 체험 움집 1기, 박물관, 선사 체험 마을 등을 조성했다. 1988년부터 일반에 공개했으며, 출토품 72점을 포함해 408개의 소장품이 복원된 움집, 움집터를 그대로 둘러싼 제1박물관, 멀티미디어와 체험 학습의 제2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움집은 둥근꼴 형태로 길이 5.5m, 깊이 1m 구조로 가운데는 화덕 자리가 있다. 모든 움집의 문이 남향인 것도 특징이다. 동물의 습격을 막기 위해 움집 바닥을 낮추고 꼭대기에는 연기 배출용 구멍도 만들었다.

백제시대만 해도 이곳이 서울의 중심지였다. 백제 왕성으로 보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부터 하남의 미사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백제시대 여(呂)자형 주거지들이 모래 땅 속에서 무수히 발굴된 것이 그 증거다.
1979년 사적 지정 후 조성된 암사동 선사유적 공원에는 8만㎡에 이르는 평평한 땅에 멋진 소나무숲이 복원된 움집을 덮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공원 조성 이후 심은 것들이지만 신석기시대 풍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멀지 않은 한강 나루 이름이 소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송파(松坡)였기 때문이다.

발굴된 주거지와 층위를 전시하는 보호각(위)과 내부의 발굴된 집자리 모습
대홍수로 드러난 빗살무늬 유적
유적 서쪽은 조선시대 중부내륙 교통의 요지였던 광나루가 자리한 천호동이다. 동쪽에는 암사가 있는 낮은 산이 강쪽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한강은 암사동의 응봉(鷹峯)과 광장동의 아차산이 양쪽의 벽처럼 서 있어서 하폭이 좁다. 이곳을 통과한 강물은 암사동 지역에서 넓어지게 되어 유속이 떨어져 강자갈과 모래를 쌓게 된다. 여의도나 미사리 섬도 그러한 강 흐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하천퇴적 지형은 강의 흐름 변화에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암사동은 제방 역할을 하는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매년 홍수 걱정을 하던 곳이었다. 신석기시대 풍요로운 마을의 재난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까지 지속되었던 셈이다. 을축년 대홍수(1925년) 때 이 지역이 침수돼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등 일본 고고학자들이 이때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를 시베리아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사용하던 소위 캄 케라믹(Kamm-keramik, 독일어로 빗살무늬라는 뜻) 문화의 한 자락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고, 오랫동안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기원이라고 생각되었다.

빗살무늬토기 편이 보여주는 다양한 문양들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에서 암사동 유적이 가장 오래된 연대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전형적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빗살무늬는 토기의 표면에 음각으로 길고 짧은 선들을 연속해서 긋거나 찍어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기의 아가리 부분, 몸통부분 그리고 아랫부분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교한 문양을 넣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문제는 이러한 토기가 가장 오래된 층, 즉 6,000~7,000년 전의 층에서 나오고 그 이후 층에서는 문양의 면이 줄어들거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새로운 문화가 등장할 때는 엉성한 시제품이 나오다가 점차 정교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암사동 유적이 지속되는 적어도 3,000년 이상의 시간 속에서는 빗살문 양식이 정교한 것에서 엉성한 것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선사시대의 수수께끼다.
빙하시대 동안 지속된 구석기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언저리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는데 암사동의 신석기 유적이 나타날 때까지 거의 4,000년 동안 한반도 지역에는 뚜렷한 유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암사동 사람들의 출현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더구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일본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적어도 1만5,000년 전에 토기가 나타난 곳이다.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정착촌들은 아마도 빙하시대가 끝나는 1만8,000년 전 황해 저지대에 흐르는 큰 강들에서 시작되었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에 오래된 토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수수께끼다. 빗살무늬토기 역시 지금은 바다가 된 황해 저지대의 큰 강변들에서 출현하고 발전하다 그 극성기에 암사동에 출현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론이 사실이라면 황해 해저에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1만 년의 토기문화 공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후세 고고학도들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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