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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밭 화가' 이숙자 씨( 2011.01.28. 오후 6:32/한국경제신문발췌)

아틀리에 전체가 보리밭 같다. 바람에 흔들리며 몸을 부비는 청맥(靑麥),따글거리는 햇살 아래 익어가는 황맥(黃麥) 보리 낱알들이 금방이라도 불거져 나올 것처럼 사실적이다. 세필로 하나씩 그린 보리수염도 푸른색과 황금색으로 빛난다.

경기도 일산 중산동에 있는 화가 이숙자씨(69)의 작업실.'보리밭 화가'로 불리는 그의 또 다른 농사밭이다. 고려대 교수로 정년퇴임 2007년이니,학생들 가르치는 일 말고 '보리 농사'에만 전념한 지 4년째다.

"보리알을 표현할 때는 돌가루 채색(암채·석채)을 사용합니다. 돌가루나 보석가루를 아교와 섞어 화폭에 입체적으로 앉히죠.산호나 조개가루를 쓰기도 해요. 컬러풀한 자연석이 많지 않아 안료를 넣은 인공 암채를 활용하기도 하지요. "

보리알을 손으로 만져 보니, 입체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2m가 넘는 화판에 이 많은 낱알들을 일일이 다 만들어 붙이다니 그는 암채를 담은 유리병이 1900개 정도 된다고 했다. 화판 속의 보리알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그림 한 점에 그려 넣는 보리 이삭이 1500여개.이삭 하나에 30개 정도의 낱알을 그려 넣으니 4만5000개가 넘는다. 그 위에 채색을 7,8회 반복한다. 보리수염은 이보다 더하다. 보리알의 3배 이상을 그려야 하니까 15만개에 달한다.

"보리알로 우둘투둘해진 화판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수염을 그리는데 나중엔 손이 닳아 피가 맺혀요. 스카치 테이프를 붙이고 해도 그마저 닳아 피부가 벗겨지곤 하죠.이렇게 한 폭을 완성하는 데 6개월이상 걸립니다. "

그는 2년 전에 시작해 지난해 완성한 '보리밭-사계'를 가리키며 "이젠 그림을 많이 그리지는 못하고 한 작품에 최대한 열정을 쏟는다"고 말했다. "마음은 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작년엔 손목 인대에 염증이 생겨서 뼈처럼 튀어나오는 바람에 심한 통증에 시달렸죠.남들이 미용을 위해 맞는다는 보톡스를 저는 손목에 맞았어요. 젊은 시절엔 26시간 쉬지 않고 작업한 적도 있는데 땐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 일해야 마음에 들었거든요. "

그는 지난해 완성한 그림이 6점밖에 안 되지만 완결성을 추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건강에도 무리가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지금 그리는 보리밭은 과거의 작품들과 분명히 다릅니다. 저는 똑같은 보리밭을 그리지 않아요. 처음엔 보리 이삭과 알에서 '실한 매력'을 느꼈고 거기에 푹 빠졌죠.어느 시점에 보리밭의 서정성을 깨달았는데 낱알이 아니라 보리수염에서 느꼈어요. 낱알 때문에 세필을 긋는 게 힘들었지만 수염을 그리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후에는 또 줄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초기 그림을 보니까 수염을 거의 안 그린 것도 있더라고요(웃음)."

이번에 그린 '보리밭-사계'에는 줄기와 수염 알맹이 등이 다 들어가 있다. 하늘과 구름 풀꽃 산까지 넣어 자연 전체의 서정성을 살렸다. 그만큼 시야가 더 넓어졌다는 의미다.

"끝없는 변신과 창작에 대한 부담감은 지금도 저를 짓눌러요. 아침에 눈을 뜬 게 원망스럽고 초조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보리를 그리고 있으면 이런 응어리가 사라집니다. '두 시간만 보리를 그리고 다른 작품을 해야지'라고 생각해도 보리를 그리다 보면 어느덧 네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이번 '보리밭-사계'는 어쩌면 제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작품이랄 수 있죠."

100호짜리 '황맥-바람결' 연작도 두 점 보인다. 왼쪽 그림은 지난해 봄에 시작해 연말에 완성했고 오른쪽 작품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그는 이번 작품을 그리면서 보리수염 몇 개에 그림이 확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고 했다. "수염이 그림의 느낌을 바꾸는 걸 보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껴요. 수염 하나하나의 터프함,부드러움,각도가 모두 다르죠."

아틀리에 한쪽 벽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작업해야 하는 3폭짜리 '백두산' 대작이 미완성인 채로 걸려 있다. 2001년 이미 가로 14.54m,세로 2m짜리 8폭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했던 그가 새로운 백두산을 그리고 있다니.그는 이번 '백두산'은 10년 전에 시작했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9년이나 묵혀뒀던 것이라고 했다.

"이만큼 작업한 것이 아까워서 더 늙기 전에 완성하려고 올해 다시 하는 겁니다. 연말까지는 완성하려고 해요. 1999년에 백두산을 스케치해서 착수한 작품이에요. 백두산을 상상이나 자료만으로 그릴 수 없어 현장에 갔는데 너무나 웅장해서 아주 크게 그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죠.2001년에 발표한 그림을 그릴 땐 작업 중에 쓰러져서 한달간 입원하기도 했죠. 이번엔 두 달 동안 열심히 그렸는데 변한 게 별로 없네요(웃음).그래도 제 그림과 같은 사진이나 자료는 세상에 하나도 없잖아요. 피카소가 인물의 모든 면을 그리고 싶어 얼굴의 양면을 함께 그린 것처럼 저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

그의 고민은 늘 한국화의 정체성 찾기라는 화두와 맞닿는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서양화보다 한국화,그중에서도 채색화를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 근대동양화 연구'라는 논문에서 채색화가 진짜 자생적인 우리 미술이라고 주장했다.

"예전엔 채색화를 일본 아류라고 멸시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닙니다. 일본의 아스카,하쿠호 문화는 우리가 전파한 거잖아요. 그게 일본미술의 뿌리인데,조선 말기 채색화의 전통을 살린 김은호도 일본 사조를 따랐다고 광복 후 비난받았어요. 채색화야말로 정통성이 확고한 한국화의 정체성이 담긴 정수인데 말이죠."

그가 보리밭 정서로 채색화를 평생 그리는 것도 한국화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보리밭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아름다워서 울고 싶었어요. 우리 조상들과 민족의 혼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제겐 보리밭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발견하고 우리 채색화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게 각별한 의미입니다. " 내년에 칠순 회고전을 계획하고 있는 그의 미소가 소녀 같다.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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