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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꽃과 새 그리고 공생

창가에 새소리에 눈을 떴다. 이 집에 이사왔 때 느끼던 불안감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다. 도시에서 그리고 빌라가 많은 주택가에서 나는 고요함 보다는 편의를 추구하기 위해 이 집으로 이사를 했다. 무엇보다 초 간편, 미니멀을 추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이 집을 택하고 좀 답답하다는 생각 그리고 약간의 후회도 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이웃들이 참 정겹고 소박하고, 주변에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나름의 나무들이 있는지 이사 온 지 2년째 쯤에는 아침에 새소리로 눈을 뜨고 있다. 도심에서 기대하지 못한 새소리에 나는 참 감사하다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새들이 노래할 수 있다면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새들은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간들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그들만의 시간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의 차소리 저녁에 차 소리와 오토바이 소리가 사라진 시간이 자연들의 시간이 허락되는 까닭일 것이다. 터가 없기에 나는 옥상 베란다와 내 집 창가 베란다에 화분을 놓고 가끔씩 물을 주면서 그 꽃들과 대화를 한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놈도 있고, 비실비실 하면서 내 속을 때우는 놈도 있다. 가끔 꽃다발 선물이 들어오면 내 집은 그 꽃으로 호사로워진다. 

나의 호사는 꽃밭에서 꽃을 기르는 것이다. 그 꽃들 속에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나의 로망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정원이 참 좋았다. 연못에 잉어가 뛰어 오르고 장미 향기 달콤했던 이태리 지붕 집에 살던 화곡동 시절이 내게는 내 삶을 지배하는 단상이다. 숲 속 같은 정원 안쪽에서 책을 읽거나 잉어가 뛰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무리 더운 여름일지라도  이 곳에서는 나는 그 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나는 원거리 통학을 하였다. 공항가는 길에서 서대문을 지나 돈암동까지의 긴 여정을 위해 새벽 5시에 교복을 갈아 입고 이르게 학교를 향했다. 그래서 항상 교정은 텅 비어 있었고, 내가 어느 만큼 책을 본 후에야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왔다. 참 그때는 온 학교가 내 것 같았다. 그런 습관이 지금도 몸에 배어서 직장에도 가장 이르게 출근하여 직장의 건물이 모두 내 것 같은 소유 감이 있다. 큰 저택과 큰 학교 그리고 큰 회사가 나의 소속감이기도 하지만 내가 여는 하루이기도 하다. 

나는 새소리를 정말 좋아한다. 아마도 어릴 적 새를 기르던 아버지의 취미생활 덕택에 이르게 애완새를 기른 탓일 것이다. 새소리는 기쁨을 주기도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아마도 새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와 꽃은 떨어질 수 없는 환상의 궁합이다. 천경자 화가의 꽃 그림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녀의 뱀 그림도 우리는 너무 자연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편리함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자연과 함께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경고 인지도 모른다.  아직 새소리가 살아 있을 때 아파트라는 괴물을 그만 만들고 인간도 쾌적한 삶을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주거와 공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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