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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일기

모교 교정을 걷다.

용기를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 주변 사람들과의 약속인 것 같다. 지난 연휴 6년만에 한국을 나온 친구 혜영을 만나기 위해 후암동이라는 동네를 갔었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차 한잔을 마실 장소도 없이 황량함 그 자체였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서 보니 서울역 맞은편 힐톤호텔 주변이었는데 정말 놀라울 만큼 황량하여 이곳이 서울인가 할 정도였다.

 

모처럼 만에 만남인데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있는 나는 정말 맘적으로 화가 났다. 친구를 초대할 만한 장소에서 불러 내야지 오랫만이라는 것 하나만의 이유로 이런 황량한 곳으로 불러낸 친구가 정말 야속하고 속상했다.

나야 이곳이 초행이지만 그래도 오랜 친구를 만나는데 상식밖에 장소에서 만남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갑을빌딩의 한 카페를 들어서서야 속상함도 한 풀 꺽이고, 그애를 만나는 기다림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은 변한다고 했지만 그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6년전보다 생활 형편이 좋아졌는지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제 아이들이 미국에서 취업을 하고, 막내가 대학교 4학년이라고 한다. 미국 경제도 많이 어려워서 별 재미가 없다고 한다.

 

친구와 5시 20분경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카페 종업원이 이 카페는 6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참 난감하였다. 문을 닫아야 한다니 우리는 남영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식사처를 찾는데 이 또한 초행지이니 만만한 음식점을 모르니 간판보고 판단하여 아무곳이나 들어갔다. 대학가 도로변이라서인지 그만그만했다.

날은 추웠지만 근처 아이스크림가게에서 기대 밖으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짧은 대화를 했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새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나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가족, 친구, 친지 그리고 은사들의 정신적인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한 꽃다발에서 새봄 냄새가 뭉글뭉글 피어 오르고 이제 중년이 된 내 친구 세명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어둠 속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거리를 바라보았다. 

 

늦은 밤 시간에 거리를 바라다 볼 수 있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대학가 방향으로 후식을 먹기 위해 걸었는데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새롭게 단장된 대학가 거리의 풍경과 스마트하게 담배를 피지 않는 호프집이 기대 밖으로 좋았다. 젊은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적절한 음악이 참 좋다. 혜영이와 헤어져 둘이 남은 나와 단짝 친구는 우리들이 거닐었던 모교 앞까지 왔는데 언제 또 오겠냐면서 행단보도를 건너 모교길로 올라갔다.

 

주변이 많은 변화는 있지만 전 보다 깔끔하고 인도도 넓어진 것 같다. 우리가 허기진 배를 채웠던 선다래라는 분식점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아직 그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보니 반갑고, 학생회관 그리고 사시합격 현수막을 보니 감회가 무량하다.

 

오래 전 사시를 하던 법학과 1회 동기생도 생각나고 학교는 전에 비해 더 아기 자기하여 동화 속 그림같다. 건물도 많이 늘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서관 잔디는 굳건히 살아 남아 있었다. 

혹여 늘어난 건물 때문에 내가 즐겨 상상의 날개를 펼치던 서관 잔디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미리 포기를 했는데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해 있었다. 멀리 남산 타워에 불빛이 화려하다. 오랜 전 늦은 밤 공부를 마치고 그 불빛을 보면서 귀가하던 내 모습이 교차한다. 그때 공부를 더 잘 했어야 했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 더 세상을 더 넓게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했었다.

 

이미 세상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읽었던 친구들은 빠른 사회 적응을 했고, 나처럼 낭만 타령을 하던 애들은 그 정도에서 머물러 있다. 어떻게 산 것이 승리한 삶인지 혼란스럽다. 모교의 교정을 걸으면서 그리고 교정을 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살다가 살다가 가끔 모교를 방문해 보는 것도 삶을 추수리는데는 힘이 될 것 같다. 혜영이 덕에 교정도 밟아 보고 좋은 친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