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은 정식 능호은 아니고 별칭이며, 통상 신라의 38대왕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괘릉의 위치는 물이 발원하여 갈라지는 곳으로 남쪽으로는 울산의 태화강, 북쪽으로는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을 이룹니다. 그러기에 능을 쓰기에는 부적합 곳입니다. 그래서 물위에 능을 만들어 걸었다 하여 걸괘자를 써서 괘릉이라 합니다. 원성왕은 북천 폭우로 인해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왕으로 물과 인연이 깊은 왕이었나 봅니다. 괘릉은 현존하는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무덤이며,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제도를 대표합니다.
그러면 질문자께서 물어보신 왜 능을 쓰기에 부적합곳에다 매장을 했을까?
그걸 한번 찾아보죠.
우리 나라 왕릉은 대개 후`대 왕들의 참배 등을 고려하여 국도(國都) 주변에 입지시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조와 조선조의 왕릉들은 하나같이 산수환포(山水環抱), 사신상응(四神相應: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조화를 이루는 곳)의 명당 지세에 터잡고 있는데, 경주의 옛 신라 왕릉들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경주 일대에는 평지릉(平地陵)이 있는가 하면 산지릉도 있고, 또한 문무대왕릉처럼 독특하게 수중(水中)에 입지해 있는 능도 있습니다. 수중릉이야 예외로치더라도 주로 평야지대에 터잡던 능묘가 산중턱이나 기슭으로 옮겨 입지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풍수지리설이 바야흐로 그때부터 능묘 입지의 주요한 변수로 적용되기 시작했던 까닭인 것입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괘릉(掛陵)은 그러한 과도기에 조영된 왕릉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능묘는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과 연관돼 있는 능입니다.
때문에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선도산 자락의 태종무열왕릉 (654-661 재위), 송화산 중턱의 전(傳) 김유신(595-673)묘, 내남면 부지리의 경덕왕릉(742-765 재위) 등이 모두 풍수적으로 그럴듯한 자리에 터잡고 있기는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어디까지나 괘릉이 우리 나라 풍수 분묘의 기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성왕(元聖王: 785-798 재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괘릉은 사실상 풍수적으로 그렇게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다. 무작정 괘릉터를 대단한 명당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숭복사 비문의 내용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억측에 불과하며, 최치원이 찬(撰)했다는 그 비문의 내용은 도대체 어떤 것이며, 또한 괘릉터가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풍수 비밀은 과연무엇이었을까요?
숭복사 비문에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적혀 있습니다. 괘릉터에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왕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되는 파진찬(波珍 ) 김원량(金元良)의 원찰(願刹)이었던 동곡사(洞鵠寺)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옵니다.
그런데 원성왕이 붕어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그의 시신을 토함산 서쪽 동굴에서 화장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그 뼈를 묻을 마땅한 장소를 고르는 것이 크게 문제됐던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왕의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 방식과 화장한 뼈를 바다나 산에 뿌리는 산골(散骨) 방식도 있었지만, 대개는 화장(火葬) 한 뼈를 땅에 묻는 것이 일반적인 장묘 방법이었습니다.
불교식 다비(茶毘)의 영향을 받은데다 완전한 뼈를 얻기 위한 이른바 화기세골(火氣洗骨)의 한 수단으로써 화장 방법을 이용했던 까닭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원성왕의 능묘터를 정하는 일이 난관에 봉착하자 급기야 동곡사터를 능터로 삼자는 의견까지 개진되기에 이르렀는데, 그에 대해 그 옛날 공자의 집을 유씨(遊氏)의 사당으로 삼으려 한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능터로 삼는 쪽으로 기울게 됐던 것이었습니다.
괘릉의 또 다른 풍수 의문은 바로 수중 안장설(安葬說)입니다. 본래 그곳 능을 건 후,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인데, 과연 그곳에 연못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장례 방식이 도대체 어디에 연유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수중 왕릉인 문무대왕릉을 흉내내어 그런 장례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청오경'에 나오는 "늪과 물가, 연못과 호수는 진룡(眞龍)이 쉬는 곳이니 진실로 그 안에서 구할 것이오, 삼가 밖에서 찾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沼沚池湖 眞龍憩息 情當內求 愼莫外覓)"라는 구절을 잘못 이해 하여 그런 행태를 보였을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어찌됐든 요즘의 음택(혹은 묘지)풍수 논리로 보자면 그야말로 풍수 금기사항을 철저히 외면한 묘가 바로 괘릉인 셈이다. 절터에다 능묘를 조성한 점도 그렇고, 뼈가 쉽게 썩을 수 있는 물 속에다 유해를 안장한 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법, 비록 신도(神道) 초입에 놓여있는 서 역(西域)사람의 얼굴을 한 무인석 만큼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괘릉터를 통하여 한국풍수가 초기에는 어떻게 전개됐던가를 아는 것 만으로도 그 능묘가 지닌 풍수사(史)적 의의를 헤아려 줌직합니다.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는 숭복사는 동서의 3층 석탑만 남겨 놓은 채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그토록 넓었다는 사찰 경내에는 지금은 대규모 감나무 밭이 들어서 있고, 그저 이곳 저곳에 간간이 눈에 띄는 커다란 돌들만 숭복사의 옛 영화를 전해 줄 따름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료들을 살펴본 결과 괘릉은, 옛 동곡사터를 능터로 바꾸고, 수중에 안장되었다는 것이 그 당시 유풍수지리설이 유입되어 조영된 과도기적 능으로서 풍수에 의한 것만은 확실하나 정확하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했는지는 현재 이상의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미스터리로 남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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