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떠난 아이 <저승 행복 기원> 자궁 빼닮은 항아리를 관 사용
한반도의 독무덤, 세계 最古 수준… 삼국 왕릉 못지않았던 마한 독무덤
2m 대형 독에 족장-유물 함께 묻어… 동남아 구슬 발견돼 해상교류 흔적
마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옹관들. 기원전 2세기∼기원후 6세기 충청·전라 지역에 걸쳐 있던 마한은 독특한 독무덤 문화를 형성했다. 길이 2m가 넘는 수백 kg의 대형 항아리를 만들어 시신과 각종 보석 및 유품을 넣기도 했다. 사진 출처 국립나주박물관
《7000년 전부터 한반도에 독무덤>>
돌아가신 분을 항아리에 모신 무덤을 ‘독무덤(옹관묘)’이라고 한다. 좀 생소해 보이지만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풍습이다. 한국에서는 약 7000년 전부터 독무덤이 사용되었고, 1970년대까지도 호남지역에서 사용되었다. 특히나 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에서 1500년 전에 만든 독무덤은 세계적으로 독특하다.2m가 넘는 대형 항아리 무덤에 족장과 귀족을 화려한 황금 유물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왜 마한 사람들은 삼국의 다른 나라와 달리 거대한 항아리에 귀족과 족장을 모셨을까.
항아리에 무덤을 쓰는 풍습은 유라시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데, 특히 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빨리 독무덤을 만든 나라 중 하나이다. 부산 영도구 동삼동에서는 약 7000년 전에 쓴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며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정도로 빠르다. 빗살무늬토기도 독무덤으로 사용되었으니, 경남 진주 상촌리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집자리 바닥에서 3개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화장하고 유골을 집에 함께 모셔 두며 그들을 기렸다는 증거이다. 사실 세계에서 토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지역이 동아시아이니 독무덤이 가장 먼저 발달한 것도 당연하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발견된 3500년 전 독무덤 내부 모습. 독무덤 양식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항아리에 시신을 넣으면 마치 자궁 속 태아 같은 모습이 되어 고인에게 명복을 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왜 굳이 돌아가신 분을 보내는 관으로 항아리를 사용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태아를 품은 자궁을 연상시키는 외관 때문이다. 실제로 항아리 속에 사람을 넣으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처럼 된다. 무덤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죽음이 그 사람의 소멸이 아니라 저승에서 더욱 행복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즉,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이런 까닭에 세계 곳곳에서 독무덤은 공통적으로 어려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무덤으로 많이 쓰였다. 남한에서도 독무덤으로 유명한 전남 나주 일대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아이의 무덤으로 항아리를 사용했다. 근대적인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전염병 같은 여러 질병에 속수무책이었으니 유아 사망률은 매우 높을 수밖에 었었다. 그렇다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달랐겠는가. 세상의 빛을 제대로 못 보고 떠난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염원을 담으며 독무덤을 쓴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담은 독무덤은 삼국시대가 되면서 환골탈태하여 영산강 일대의 족장들이 사용하는 대형 고분으로 성장한다. 성인 남자가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2m가 넘는 규모의 항아리를 구워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독무덤을 만들어 썼다.
전남 나주 신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마한의 금동관. 사진 출처 국립나주박물관
거대한 독무덤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흙으로 그 거대한 크기를 빚어서 휘거나 터지지 않게 골고루 구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토기 가마를 개량해서 새롭게 거대한 토기 가마를 건설해 독을 구워냈다. 그렇게 구워진 수백 kg의 옹관이 무덤까지 40km가 넘는 길을 이동해 운반됐다. 독무덤을 만들고 쌓는 과정은 줄잡아 6개월 이상이 소요되고 수백 명이 동원되는 행사였다. 게다가 그 안에는 화려한 금동관, 금동신발과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다양한 유물이 들어갔다. 삼국의 어떤 왕족 무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마한의 독무덤은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나주 복암리의 거대한 고분군으로 완성되었다. 나주 복암리의 고분군은 특이하게도 여러 무덤을 층층이 쌓아서 마치 아파트처럼 만들어졌다. 다른 사람의 무덤에 몰래 끼워 넣는 ‘첩장’이 아니라 서로 터를 양보해 가며 여유 있게 자리를 만든 것이다.
복암리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무덤도 나왔으니, 겉은 백제 스타일로 돌무덤 방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마한식의 독무덤을 넣은 것이다. 백제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백제의 무덤을 만들어 썼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자주성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고분의 외형도 거대하고 일률적으로 쌓지 않고 그야말로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형태로 쌓았다. 다양한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개방성과 자신만의 독자성을 함께 내세운 흔적이다.
일반인들은 삼국만 생각할 뿐 마한은 잘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이기 때문에 마한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무덤을 일구어낸 마한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이 밝혀졌다.
왜 마한 사람들은 독무덤을 거대하게 만들었을까. 마한 사람들의 독무덤은 그 기원이 약 2400년 전 만주 일대의 고조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고조선의 청동기가 마한지역으로 전래되면서 독무덤도 함께 전래되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며 부여와 고구려에서 시작한 백제 세력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마한은 위축되었다.
결국 지금의 나주 일대까지 밀려오게 되자 마한의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만들었던 독무덤을 보란 듯이 커다랗게 만들어서 삼국의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자존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의 신라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며 북방지역의 무덤과 비슷한 돌무지 무덤과 금관을 만들었다. 이렇듯 지도자의 무덤은 단순한 무덤을 떠나서 그 나라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장이었다.
마한의 독무덤은 자주성과 함께 해상 교류의 상징이기도 했다.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일대에도 규모는 작지만 마한의 것과 비슷한 독무덤이 발견된다. 마한의 무덤에서는 구슬과 같이 동남아에서 수입한 유물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마한의 독무덤은 해상 교류를 통해 동남아로 이어진 셈이다.
독무덤은 한국을 대표하는 특색 있는 유물인 동시에 바다와 육지를 잇는 한국의 국제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최근 중국은 ‘일대일로’를 내세우면서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독점하려고 했다. 하지만 육상과 바다를 잇는 교류의 길은 바로 마한에도 있었다.
이렇듯 세계적 가치가 있는 마한의 독무덤이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만 유명할 뿐 마한의 독무덤이 가진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워낙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심의 역사에 익숙한 탓이다. 생각해 보면 크지도 않은 한반도에서 영산강 유역의 마한, 동해안의 옥저, 동예, 읍루, 그리고 강원도의 예맥까지 우리도 모르는 잊혀진 한국사의 주역이 너무나 많다.
투박해 보이는 항아리로 만든 독무덤에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려는 애틋한 사랑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무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무덤에 있는 그 누군가는 살아생전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사실 무덤은 먼저 떠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 실현된 공간이다.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이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답거나 거대해서가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어머니의 사랑과 부모에 대한 애틋함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5월은 가족의 달, 감사의 달이다. 그래서일까. 화려한 황금이나 사람을 압도하는 건축물은 없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있는 항아리 무덤이 우리에게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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