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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네가 없는 삶​

mama77 2024. 6. 24. 10:10



네가 없는 삶

황동규

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네가 말했을 때

우리는 천천히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앞 벼랑 끝에 V자형 진달래꽃 뭉치

뛰어내릴까 말까 아슬아슬 걸려 있고

저수지 수면은 온통 새파란 물비늘,

아주 정교히 빚은 그릇일 수도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말하려다 화들짝 놀란다.

수위(水位) 낮아진 저수지에 어느샌가 가을이 깊어

색채들이 모두 나무에서 뛰어내려

물가까지 내려와 누워 있고

아예 물속에 든 놈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음 돌려

물가에 서 있는 술병도 있었다.

물새 한 마리 쓸쓸히 자맥질하고 있는 물에는

물속 땅에 박힌 건지 물 위에 뜬 건지

조그만 배 하나 멎어 있고

하늘이 통째 빠져 있는 수면엔

밝은 조개구름 한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가까이 사람 소리

아끼듯 조용히 나누는 말소리, 한참 잠잠하다

이윽고 차 떠나는 소리.

물새 어디 갔나, 자취 없고

조개구름 흘러가버리고

무덤덤히 배가 혼자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