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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글모음

일몰을 바라보며

 

태양이 서산을 넘어갈 때
넘어간 뒤의 긴 여운과
이윽고 별이 떠올 때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가
무엇을 더 바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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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가끔 구름산을 올라 서녘 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본다. 내가 사는 사찰은 산 능선을 등지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일출은 자연스럽게 보게 되지만, 일몰을 보려면 일부러 산을 올라야 한다. 일출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을 다지고, 일몰을 바라보며 하루를 건강하게 보냈음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고 싶은데, 시간 맞춰서 산꼭대기에 올라야 가능한 일몰은 관측하기가 쉽지 않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천천히 가는 것 같지만, 가라앉는 순간만큼은 어서 떠나고 싶다는 듯 빠르게 서산을 넘어간다. 그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싶을 때, 우리의 생애도 해가 서산을 넘어가듯 산 너머의 세계로 살짝 건너가는가 싶기도 하다.

미얀마 바간의 슈웨산도 파고다는 매일 저녁 일몰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크고 작은 탑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지평선의 한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도 장관이다. 좀처럼 넘어갈 것 같지 않던 태양이 지평선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마치 다이빙하는 것처럼 지평선 밑으로 뛰어든다. 내가 "태양이 마치 지하를 향해 다이빙하는 것 같네요"라고 했더니, 옆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받아친다. "태양은 밤새 잠수하여 내일 아침 동쪽에서 솟아오를 겁니다." 그때 나는 이 말이 태양도 하룻밤 푹 쉰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래, 태양도 매일 밤 사람처럼 휴식을 취하는데, 나도 느긋해지자.

일몰 이후가 더 장관이다.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의 여운, 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시간이 바로 추모의 시간일까? 뻐꾸기가 노래하고, 부엉이도 장송곡을 울린다. 꿩도 허스키한 나팔을 분다. 이들이 모두 관악기를 연주한다면, 딱따구리는 타악기를 연주한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이 시간이 사람에게는 49일재 기간이 아닐까 싶다.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황망해하는 가족들에게 "하루를 마감하고 잠수하는 태양처럼 영가는 지금 잠시 잠수하는 겁니다"라고 말하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하는 성싶다. 어쨌든 태양이 떠난 후의 여운이 오래 남듯이 사람이 떠난 후의 여운은 49일 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

서해안 간월암에서의 일몰이 생각난다. 출근했던 사람들이 저녁이면 돌아오듯이, 새들이 간월암 주변 바다와 간척지에 모여들더니 갑자기 일제히 솟아오른다. 한꺼번에 솟아올랐다가는 다시 질서 정연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군무(群舞)를 추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새들이 집단적으로 추는 바라춤이다.

엄숙하고도 화려하고도 숭고한 군무가 잦아들 때면, 간월암 종소리가 함명춘의 시 '일몰'을 나지막하게 들려준다. "참 탈도 많았던 길이었지 삶은/ 누구나 미처 다 읽지 못한 아픔의 책 한 권씩은 갖고 있는 거"라며 "떠난 줄 알았던 적막이 그리움을 향해 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넘어온다"는 대목에서, 해송들이 낡은 솔잎을 몇 개 흩뿌린다.

오랜만에 구름산에 올라 일몰을 바라보며, 자주는 아닐지라도 가끔은 일몰을 관측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태양이 서산을 넘어갈 때 가장 아름답듯이, 나의 죽음도 그렇게 아름답게는 아닐지라도 고요하게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분주했던 마음을 쉬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책망만 하고, 재촉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끔은 일몰을 바라보며, 그동안 수고해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전하고, 안마도 해주고 아름다운 음악도 들려주고 숲의 향기도 넣어주기로 한다. 일몰의 여운인 노을이 엷어지고, 어두운 바탕에서 서서히 별이 뜰 때, 그래, 무얼 더 바랄 것 있느냐고 바람이 분다.

[동명스님 광명 금강정사 총무] 매일경제 2023.03.11.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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