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 두타산에 있는 무릉계곡으로 출발하였다. 날씨 탓이지 고속도로가 많이 밀리고 있다. 나는 밀리는 차 안에서 마치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여행지를 찾아는 마음으로 관광 안내 지도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을 하고 보니 풍경이 생소하지 않고 매우 친근감이 들었다. 그래서 몸이 알아서 걸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관광지도에 나오는 명소가 오래전 친구와 같이 용추폭포를 향해 걸었던 것이 현지에 가서야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여행시 급히 산을 오르기 위해 그냥 스쳐 지나갔던 삼화사 절집을 자세히 보기로 마음을 먹고 삼화사로 오르는 길에 지난번 TV에 용이 오른 자리가 있다는 물길을 보았다. TV를 보면서 "저기가 어디지?" 하고 의문이 일었는데 막상 용 오름의 흔적인 검푸른 자국이 물속에 있으니 진짜 용이 이 무릉계곡 물길을 따라 하늘로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산백과 사전을 보니, 삼화사는 을 보니 " 월정사의 말사로 642년(선덕여왕 11)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고,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삼화사는 템플스테이도 하는 절집으로 위의 사진이 일반 수행자가 머무는 곳인데 요 지점에 서 있으니 계곡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근처 벤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니 신선이 따로 없고 곧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다.
신라 때 부터 있던 사찰이라니 그 태고의 아름다움 속에 전설도 많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 절집을 가는 길이 즐겁다.
드디어 일주문을 들어서고 절집이 멀리 다리 건너에 있다.
용오름 길을 지나 삼화사에 첫 발을 내 딪으니 절집이 단아하고 너무나 정갈하다. 그동안 늘 절집을 건성으로 보았는데 마침 기와불사를 하고 있어 오늘은 마음 먹고 기와 불사에 동참하고자 기와에 글을 쓰고 기도를 올렸다.
삼화사 고금사적에 의하면 이 절집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서역에서 석주를 타고 온 약사불 삼형제는 곧장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큰형으로 보이는 약사불이 걸음을 멈췄다. 좌우로 산세를 둘러보니 검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였다. 형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터를 잡겠다. 이곳은 천하의 명산이니 둘러보면 너희들이 머물 곳도 있을 것이다. 각각 터를 잡은 후 다시 만나자."
이렇게 하여 큰형은 삼화촌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가 터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이고, 셋째는 그 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삼형제가 자리를 잡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형제는 모두 변설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곧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셋째는 백련대라 했다.
삼형제는 때가 되면 흩어져 사는 형제를 찾아가 서로 위로하고 공부한 바를 토론하기로 했다.두 아우가 형이 있는 곳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오면 형은 예를 다해 이들을 맞이하고 고준한 담론을 나누었다. 따라온 무리들은 이들의 담론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졌다. 또 얼마가 지나면 이번에는 둘째의 집으로 방문하고, 다음은 셋째의 집을 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방문했는데 그 우애가 지극했다. 이렇게 교화활동을 펴던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화되고 불심이 깊어지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때임을 알았다. 어느 날 형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정화되어 부모에 경순하고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 간에는 화목하니 더 이상 교화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생들은 마음이 거칠어 우리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나자. 그러나 우리가 떠난 뒤 세월이 한참 더 지나면 인심이 다시 황폐해 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기는 하되 등신불(等身佛)을 남기고 가자. 그리하면 사람들이 그 등신불을 보고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이다. 등신불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철불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약사삼형제는 어느 날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약사삼형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각각 스승이 있던 곳에 절을 지었다. 큰형이 있던 삼화촌 흑련대에는 삼화사를 짓고, 둘째가 머물던 지상촌 청련대에는 지상사를 지었다. 그리고 셋째가 머물던 궁방촌 백련대에는 영은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철불에 공양을 하면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모에 효순하며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과는 화목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수없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사불이 머물며 가르친 인륜과 도덕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철불을 친견할 때마다 불심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맑아졌다. 사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마다 절로 찾아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약사불은 등신불이지만 살아 있는 생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믿음은 약사불과 사람들 사이를 보이지 않는 끈끈한 하나의 끈으로 묶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철불에 얽힌 수많은 영험설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경내에는 마침 백중기도로 도량에 스님의 목탁소리와 대중들의 기도가 베아리 치고 있었다. 이 절집은 대웅전·약사전(藥師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 3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碑)와 부도(浮屠)가 있다.
<로사나 철불 보물 제 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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