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특징을 지닌 어느 배우가 특정한 캐릭터나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되고 꾸준히 캐스팅될 때, 우린 그것을 '타입캐스팅'(typecasting)이라고 한다. 특히 이른바 '조연' 전문일 경우,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한 명의 배우에게 꾸준히 캐스팅되는 어떤 '타입'이 있다는 건, 그 배우만이 할 수 있는 특화된 전문 분야가 있다는 의미. 감독이나 프로듀서 입장에서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관객은 타입캐스팅된 배우를 보며 익숙한 쾌감을 기대하기도 한다.
최근 2~3년을 중심으로, 충무로계에서 타입캐스팅 되는 배우들을 살펴보았다. 한 배우의 능력은 어떤 범주로 한정시킨다기보다는, 그 배우의 이미지가 현재 한국영화계 안에서 주로 어떤 캐릭터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숫자는 편의상 붙인 것으로, 순위와 무관하다.
글l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네이버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충무로 타입캐스팅 17
1. 박철민 '달변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쉴 새 없이, 특유의 단어 구사력과 완급 조절로 달변을 늘어놓는 배우.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하는 박철민의 입담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영화는 아마도 [목포는 항구다](2004)의 '가오리'일 것이다. "쉭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1번가의 기적](2007)에서 복서로 등장한 하지원이 따라 하기도 한 이 대사는 그의 존재를 충무로에 알렸고, 이후 아무리 작은 역을 맡아도(카메오 출연일지라도) 결코 기죽지 않는 말솜씨를 선보였다. [화려한 휴가](2007)처럼 무거운 실화 드라마에도 자연스레 묻어나면서 달변가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는 건 박철민만의 매력이자 강점. [스카우트](2007. 사진)에서 '비광송'을 읊조리는 그의 모습은 어떤 경지를 느끼게 한다. 개봉중인 [오싹한 연애](2011)에서도 여전한 그의 모습을 확인하시길.
2. 송새벽 '눌변가'
박철민의 반대편에 송새벽이 있다. [마더](2009)에 세팍타크로 형사로 등장했을 땐 발성이 조금 독특한 배우 정도로 생각했지만, [방자전](2010. 사진)부터 시작된 그만의 눌변적 기질은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거의 [넘버 3](1997) 송강호 급의 임팩트!). 그 결과 방자 캐릭터를 재조명하려 했던 영화는 엉뚱하게도 '변학도의 재해석'이 되었고, 이후 [부당거래](2010) [해결사](2010)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그리고 [위험한 상견례](2011)와 [7광구](2011)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의 말투는 영화의 가장 독특한 사운드였다.
3. 백윤식 '멘토'
약간은 도사 느낌이 나는 스승 캐릭터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는 단연 백윤식이다. 어쩌면 [지구를 지켜라!](2003)의 강 사장은 그의 본색과는 약간 곁길에 있는 영화. 이후 그는 [범죄의 재구성](2004)에선 사기꾼들을 이끌었고, [그때 그 사람들](2004)에선 부하들을 이끌고 거사를 치렀으며, [싸움의 기술](2005)에선 전설적인 싸움 고수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타짜](2006. 사진)의 평경장은 백윤식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다. "보라우, 내가 누구네?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린,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응? 혼이 담긴 구라!" 이 대사를 내뱉을 때 그에게선 거부할 수 없는 멘토의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의 씨름부 감독, [전우치](2009)의 전우치의 스승 이후 그의 멘토링을 접하지 못하는 건 조금은 아쉽다.
4. 김수미 '욕쟁이 할머니'
올해는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의 군봉 아내 같은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청룡영화제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긴 했지만, 최근 10년 동안 한국영화에서 김수미가 일구어낸 독보적인 영역은 단연 질펀한 육두문자를 논스톱으로 쏟아내는 '욕쟁이 할머니'다. TV 드라마 [전원일기](1980)로 20년 넘게 닦은 내공이 처음으로 폭발한 영화는 [오! 해피데이](2003). 카메오 출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욕 연기'는 장안의 화제였고, 그 장면만 캡처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 정도였다. 이후 [위대한 유산](2003)을 거쳐 [마파도](2005. 사진)와 TV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2005)는 중견 배우의 숙성된 입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 2](2005)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홍덕자 여사'는 김수미이기에 가능한 캐릭터. 유모 캐릭터를 맡은 [구세주](2006)에선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위험한 상견례]의 춘자처럼, 고상한 척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욕을 내뱉는 개인기는 김수미의 트레이드마크.
5. 차태현 '순정남'
어느덧 데뷔 16년차가 된 이 배우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애보의 마음이다. [엽기적인 그녀](2001)처럼 우연히 만나든, [연애소설](2002)처럼 첫사랑에 가슴 떨리든,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처럼 맹목적이든, [파랑주의보](2005)처럼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되든, [바보](2008. 사진)처럼 말 그대로 바보 같은 사랑을 하든, 그의 '순정 본색'은 영원할 것처럼 지속된다. [과속 스캔들](2008)의 남현수처럼 약간은 삐딱한(?) 캐릭터를 맡더라도 관객은 그가 결국은 '착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영화가 막을 내릴 거라는 걸 기대하게 된다. 30대 중반임에도 소년의 느낌을, 그리고 순수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천연기념물(!) 같은 배우.
6. 이경영 '악의 핵심'
1990년대 충무로에서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가장 쓰임새 많은 배우였던 이경영. 잠시 힘든 시기를 겪은 후 돌아온 그는, 어느덧 40대 중반을 넘겨 나이 50을 향하고 있었고, 악역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찾기 시작했다. 이경영의 악역이 다른 건,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조금은 모호하며 때로는 뼛속까지 사악한 느낌을 전하는 그 서늘함. 그 본격적인 시작은 잠깐 등장해 묵직한 존재감을 남겼던 [파주](2009)였으며, 특히 올해는 [모비 딕](2011. 사진) [푸른소금](2011) [카운트다운](2011)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를 확고히 했다. 중후한 악당 캐릭터를 맡을 만한 배우가 드문 충무로에서 이경영의 주가는 점점 올라갈 듯.
7. 주진모 '베테랑 형사'
연극계에서 잔뼈 굵은 이 배우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알려진 건 약 5년 전. [타짜]의 짝귀와 [가족의 탄생](2006)의 운식 역은 40대 후반의 배우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통틀어 약 30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가 가장 익숙한 캐릭터는 바로 형사. 전체의 1/3에 달하며 더 이상 그에게 '김 반장'이나 '박 소장' 같은 명칭은 낯설지 않다. 최근엔 [퀵](2011. 사진)의 김 팀장 역이 인상적.
8. 이두일 '소시민'
1990년대만 해도 이두일은 꽤 다양한 역할을 맡았던 배우였다([찜](1998)에서 안재욱을 여자로 만들어주던 분장사 캐릭터는 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꽤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TV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의 영향 때문일까? 어느덧 그에겐 묵묵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느낌이 덧씌어지기 시작했고, 작은 영화에서 그 느낌은 더 강하게 살아났다. [물 좀 주소](2009)의 지친 추심원 구창식은 이두일만이 낼 수 있는 느낌. 최근엔 [스파이 파파](2011. 사진)에서, 남파 간첩이지만 딸과 함께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가 되었다.
9. 마동석 '듬직한 파트너'
TV 드라마 [히트](2007)의 남성식 형사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창이파의 넘버 3인 '곰'역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마동석은, 범죄자든 형사든 그 어떤 역할을 맡아도 상대방에게 든든한 느낌을 준다. [부당거래](2010. 사진)에서 철기(황정민)의 후배이자 파트너로 등장한 그가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할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도, 그의 충직함 때문. [심야의 FM](2010)에선 고선영(수애)의 팬으로 스튜디오를 방문한 손덕태 역을 맡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끝까지 탄탄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퍼펙트 게임](2011)에선 선동렬(양동근)의 공을 받는 포수로 등장한다.
10. 오정세 '루저 스타일'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와 충무로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오정세가 상업영화에서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는 이미지는 조금은 안타깝게도(!) 루저 스타일의 캐릭터. 부스스한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외톨이 느낌이 나는 캐릭터는 어느새 오정세의 차지가 되었다. 올해만 해도 [퀵]과 [커플즈](2011. 사진)에서, 작년만 해도 [쩨쩨한 로맨스](2010)와 [부당거래](2010)에서, 그는 다르면서도 뭔가 일맥상통하는 느낌과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장르에서 적재 적소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재능 많은 배우의 이미지가 조금은 고정되는 것 같아 아쉬운 면도 있지만, [베스트셀러](2010)처럼 루저 스타일이면서도 날이 선 듯한 느낌을 보여주는 건 오정세만의 예리함이다.
11. 김해숙 '엄마'
영화 속에서 항상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맡는다는 건 그 배우에게 어떤 느낌일까? 어떻게 보면 주인공 주변 인물이라는 기능적 역할일 수도 있고, 지극히 전형적인 캐릭터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김해숙의 엄마'는 '나문희의 엄마'나 '김혜옥의 엄마'와 조금은 다르다. 나문희의 엄마가 모성의 심원한 느낌을 담는다면, 김혜옥의 엄마엔 자아가 강한 여성의 느낌이 깃든다면, 김해숙의 엄마는 가끔은 철 없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정 많은, 우리들의 평범한(그러기에 위대한) 엄마다. [마마](2011)나 [친정 엄마](2010. 사진) 같은 '엄마 영화'에 그녀가 빠지지 않는 건 그런 이유. 하지만 이 배우에게 [무방비도시](2007)나 [박쥐](2009)의 캐릭터 같은 '쎈' 느낌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거다.
12. 정유미 '당찬 여자'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권력에 맞섰던 [도가니](2011. 사진), 옆 집의 깡패에게 전혀 기죽지 않았던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거대한 멧돼지에 맞서 산 속을 누볐던 [차우](2009). 아마도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당찬 느낌의 여배우라면 단연 정유미다. 생각해보면 [사랑니](2005)로 첫 선을 보였을 때부터 그녀는 자기 주장이 강한 캐릭터였고, [가족의 탄생](2006) [좋지 아니한가](2007)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로 이어지는 라인업에서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잃지 않았다.
13. 김상호 '조금은 특이한 이웃'
[범죄의 재구성]의 휘발유로 각광 받으면서 한국 영화계와 이젠 드라마에서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배우가 된 김상호. 독특한 마스크 때문에 단순한 기능적 조연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뒤로 하고, 진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해왔다. 최근 그가 열중(?)하고 있는 분야는 [완득이](2011. 사진)의 옆집 아저씨로 대표되는 캐릭터. [챔프](2011) [적과의 동침](2011)처럼 마을에 한 명 정도는 있을 법한, 조금은 괴팍해 보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웃 역할. 때론 [이끼](2010)의 전석만처럼 비밀을 지니기도 하고, [소년 감독](2008)의 이장처럼 따스하기도 한 이웃이다. 한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이나 [즐거운 인생](2007)의 혁수처럼 페이소스 있는 역할은 그의 전문 분야.
14. 임창정 '불쌍한 남자'
어느덧 20년차를 넘긴 베테랑 배우 임창정에게 전문 분야가 있다면 바로 '불쌍남' 캐릭터. 그가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그가 맡았던 캐릭터를 살펴보면, 이런 판단이 단지 심증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을 시작으로 의외로 여러 편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인공을 맡았는데, [색즉시공](2002)에선 가진 것 없는 차력 동아리 대학생이었고, [위대한 유산](2003)과 [청담보살](2009)에선 백수였으며, [불량남녀](2010)에선 신용 불량으로 고통 받는 형사였고, [사랑이 무서워](2011. 사진)에선 '찌질 그 자체'인 홈쇼핑 시식 모델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이 이뤄지는 건 기적 중의 기적(?) [육혈포 강도단](2010)에서 할매들에게, [1번가의 기적]에서 하지원에게 당하는 그의 모습은.. 한 번쯤은 안아주고 싶은 불쌍함이다.
15. 김윤진 '전투적 모성애'
[쉬리](1999)로 시작해 [은행나무 침대 2 - 단적비연수](2000) [예스터데이](2002)에 이르기까지, 김윤진은 총과 활을 든 여전사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때론 잔인하고 때론 전투적인 모성애의 화신이 되었다. 그 시작은 [6월의 일기](2005). 이어진 [세븐 데이즈](2007)는 확고한 방점을 찍었고, [하모니](2010)와 [심장이 뛴다](2011. 사진)에서도 여전히 극한 상황에 내몰린 모성의 깊은 감정과 악전고투를 보여주었다.
16. 김정태 '성깔남'
흔히 악역 전문이라고 하지만, 김정태의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배역의 크기에 상관 없는 그 '성깔'이다. 최근작 [특수본](2011. 사진)에서 맥주병으로 갑자기 술집 주인의 머리를 갈기는 장면은, 어쩌면 '김정태 연기'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신일지도. 형사 역을 맡든 범죄자 역을 맡든 그의 장면엔 어떤 긴장감이 흐르며, 누군가의 '충복'이 되기보다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종종 조직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곤 한다. [마음이 2](2010)이나 [방가? 방가!](2010) 같은 코믹 조연 캐릭터에서도 그의 '성질머리'는 절대 죽지 않는다.
17. 성동일 '콤비 플레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상대방과 능숙하게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것. 그런 점에서 성동일은 이 분야의 달인이다. [마음이 2]에서(그리고 예능 프로그램 [1박2일]까지!) 김정태와 호흡을 맞추는 그의 모습은 시너지 효과의 전형. 최근엔 [특수본]에서도 김정태와 중요한 관계로 등장한다. 하정우와 함께 했던 [의뢰인](2011), 조희봉과 함께 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2008. 사진)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 축구로 비유하자면, 그는 단독 드리블이 아닌 패스 플레이로 골을 성공시키는 스타일이다. 마지막으로, [페스티발](2010)에서 심혜진과 함께 했던 그 '열정의 장면'들도 빼놓을 수 없다.
201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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